대기업들 직접화법 풍조 속 한자휘호로 구성원에 일체감 심어
인수난관 현대그룹은 ‘지혜’·위기의 제지업계는 ‘협력’ 강조
지난 11일 서울 역삼동 르네상스호텔에서 열린 벤처업계 신년하례회. 이날 도용환 한국벤처캐피탈협회장은 벤처업계를 대표해 올해 신년 화두로 ‘명목달청(名目達廳)’을 꺼내며 “올해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이루자”고 말했다.
이 업계에서 신년 휘호 비슷한 게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명목달청’은 ‘토끼처럼 귀가 커서 사물에 대한 소리를 뛰어나게 듣고 판단한다’는 뜻이다.
이같이 매년 초 개별 기업이나 업종단체 등에서 발표하는 신년 휘호가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줄고 있다. 한자를 기피하는 세태와 함께 직접 화법을 중시하는 풍조 때문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신년 휘호는 새해 초 그 해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내용을 함축적이면서도 고아하게 전달, 구성원을 각인시키고 일깨우는 기능이 있다. 또 구성원에게 강한 일체감을 심어주기도 한다. 주로 넉 자 형태가 주류지만, 이를 넘어서는 것도 적지 않았다.
‘경세제민(經世濟民)’ ‘실사구시(實事求是)’ 등 국가 경제 전반을 아우른 것이거나 ‘철강보국(鐵鋼報國)’ ‘위민전기(爲民電氣)’ 등 업종별 특성을 나타낸 것도 심심찮게 쓰였다. 또는 그해 간지에 맞게 ‘호시우행(虎視牛行)’ ‘욱일승천(旭日昇天)’ 등의 것도 있었다.
이상문 대한제지공업연합회장은 “한자를 기피하고 직접적인 전달을 강조하는 세태이다 보니 신년 화두 발표니, 휘호 쓰기니 하는 것들이 사라지는 추세”라며 “ ‘온고지신’ 차원에서 살려볼 만한 의미 있는 유산”이라고 아쉬워했다. 또 “옛것이 낡았다고 신화도, 유물도 뭉갤 수는 없듯 의고한 맛을 살리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와중에도 몇몇 대기업은 의미 있는 신년 휘호를 내걸어 눈길을 끈다. 삼성은 올해 신년 화두로 사내 인트라망에 ‘불광불급(不狂不及)’ ‘우보만리(牛步萬里)’ ‘성동격서(聲東擊西)’ 세 가지를 내걸었다. 이는 각각 ‘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우직하게 목표를 향해서 가라’ ‘소리는 동쪽에서 내고 공격은 서쪽으로 한다’는 의미로, 시대의 흐름에 뒤지지 말라는 메시지다.
SK는 최근 ‘붕정만리(鵬程萬里ㆍ붕새를 타고 만리를 난다)’를 인용해 원대한 경영목표를 향해 정진하자고 강조했다. 최태원 SK 회장은 구체적으로 “사람과 문화의 혁신을 통해 신성장 사업 추진에 적극 임해 달라”고 임직원들에게 당부했다.
포스코는 ‘궁하면 변하게 되고, 변하면 두루두루 통해서 오래간다’는 의미의 ‘궁변통구(窮變通久)’를 신년 휘호로 발표했다. 정준양 회장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항구적인 경쟁 우위를 갖추자고 임직원들에게 당부했다.
현대건설 인수가 난관에 부딪힌 현대그룹은 변화와 위기에 적극 대처하자며 ‘교토삼굴(狡兎三窟)’의 지혜와 민첩함을 내세웠다. ‘꾀 많은 토끼는 숨을 곳을 여러 개 만든다’는 뜻이다.
디지털 공세로 위기에 몰린 제지업계는 최근 열린 신년인사회에서 ‘무신불립(無信不立ㆍ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을 제시하고 “업계가 지혜를 모으고 협력해 위기를 극복하자”고 강조했다.
KB국민은행은 최근 2011년에는 남보다 앞서 일을 도모하는 ‘선즉제인(先則制人)’의 마음을 통해 확고한 선두 은행으로 비상하자며 올해 경영 방향을 ‘이익 중심의 내실 성장’으로 선포했다.
KOTRA는 올해 화두로 ‘질풍경초(疾風勁草ㆍ강한 바람이 불어야만 비로소 어느 풀이 강한지를 알 수 있다)’를 제시하고, 올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우리 기업들의 수출 지원에 적극 나설 것을 다짐했다.
조문술 기자/freiheit@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