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봄. 출범 1년이 안된 KB캄보디아 은행이 현지 금융당국의 첫 감사를 받았다. 권위적인 캄보디아 공무원들은 이것저것을 꼬집고 캐물었고, 한국직원들은 “뭐라도 트집을 잡겠구나”하고 맘을 단단히 먹었다. 며칠이 지나고 날아온 감사결과서를 보고 장기성 은행장과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짧은 영업 기간에도 불구하고 시스템과 내부규정이 잘 갖춰져있다. 빠른 시간에 비즈니스를 더 확대해주길 바란다”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는 국내은행들이 진출한 국가 가운데에서도 가장 작은 시장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720달러 수준으로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도 못미친다.교민의 숫자도 5000여명에 불과하고 국내 기업들의 진출도 제한적이라 국내은행들이 ‘기댈’ 구석이 없다. 철저히 현지 영업으로 뿌리 내리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다.
하지만 KB와 신한을 필두로 한국은행들이 의미있는 성과를 잇따라 거두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은행들의 해외진출은 부동산 개발의 ‘금융지원’에 초점을 맞춰졌었다. 최근에는 현지 소매금융 시장을 빠르게 공략하며 ‘한국형 금융’이 해외시장에 자리잡는 모델 역할을 해내고 있다.
▶ 뿌리내리는 ‘한국금융 2.0’ = 관공서와 금융기관이 밀집한 프놈펜의 중심 상캇 보응 레잉(Sangkat Boeung Raing) 거리에 위치한 KB 캄보디아은행 본점에는 아침마다 현지 고객들이 줄을 선다. 영업을 시작하는 오전 8시30분부터 11시 무렵까지는 창구가 빌 틈이 없다.
기준금리가 없는 캄보디아에서 한국 은행들의 예금 금리는 현지은행에 비해 1%포인트 정도 낮다. 그런데도 지난해 하반기부터 고객 숫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 ‘빠르고 정확하고 안전하다’는 입소문 덕분이다.
식당을 운영하는 다이앙씨(남ㆍ41)는 “KB는 친절하면서도 일처리가 빠르다. 캄보디아 은행에서는 돈 찾는데도 몇십분씩 걸 걸리는데 여기선 몇분이면 된다”고 말한다.
KB의 경우 여신의 90% 이상이 로컬 고객에게 나간다. 전체 고객수 기준으로도 70%는 현지인 고객이다.
지난해에는 출범 첫해임에도 약 70만 달러의 이익을 냈다. 2년먼저 진출한 신한크메르은행은 1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뒀다. 캄보디아의 30여개 은행 중에 지난해 흑자를 낸 곳은 몇 군데 되지 않는다.
장기성 행장은 “부자 고객 한 두명으로 볼륨을 단번에 키운 것이 아니라 밑바닥부터 고객층을 탄탄히 다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면서 “원칙이 없는 곳에서 원칙을 지키며 영업을 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아직까지 단 한건의 대출 연체가 없었을 만큼 안정적으로 고객층이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 발로, 마음으로 시장을 연다 = 캄보디아의 금융인프라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은행간 전산거래가 안돼 거래은행을 옮기려면 그야말로 돈뭉치를 싸들고 가야한다. 신용정보공유 시스템이 없어 대출 심사가 쉽지 않을 정도다. 한국의 은행들은 차별화된 시스템과 서비스, 열정으로 이를 돌파해내고 있다.
이재준 신한크메르은행장은 “심사하는데 3개월이나 걸려 대출해준 식당에 한두달 마다 갔더니 “부담되게 왜 자꾸오냐”면서 화를 내기도 하더라(웃음). 그렇게 직접 가보면서 경기흐름이나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이 양질의 고객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신한은 소호들과 3000만 달러가 넘는 거래를 했다.
현지화 작업도 전방위로 진행중이다.
KB는 한국 파견을 앞둔 근로자들에게 한국에 대한 무상 교육을 실시한다. 단순히 송금고객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캄보디아 사람이 한국에서 5년 정도 일하면 가게를 겸한 작은 집을 한 채 프놈펜에 마련할 수 있다. 이때를 내다본 포석이다.
신한은 자매결연 지역에 우물을 파고 정수시설을 설치해 가정까지 수도관을 연결해줬다. 덕분에 캄보디아 정부와 국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최근에는 10만달러 정도를 출연해 이지역민들을 위한 미소금융 활동도 벌였다. 신한의 사례는 현지 언론을 통해 여러차례 소개됐다.
지점 분위기도 다르다. 로컬은행에는 아직도 철창이 있다. 국내은행들은 시원한 유리창과 고급스런 실내 장식의 개방적인 구조다. 직원들은 국내에서 공수한 노란색(국민), 하늘색(신한) 유니폼을 입는다. 최근들어 몇몇 현지은행들도 한국식으로 지점을 바꾸고 유니폼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 ‘작은 호랑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융위기로 움츠렸던 캄보디아 경제는 최근 꿈틀거리고 있다. 섬유와 봉재, 단순 제조 등 인건비 비중이 높은 산업들이 베트남과 중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속속 캄보디아로 넘어오며서 고용이늘고 서민노동자들의 소득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주특기인 농업에도 연일 외국의 투자자금이 몰린다.
지난해 가을 스위스 UBS는 “캄보디아가 ‘미니 호랑이’(mini-tiger)로 떠올랐다”고 분석했다. 특히 “섬유가공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를 ‘충격(shock)’이라고 표현하면서 캄보디아 경제가 본격적인 성장기에 접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프놈펜 시내에서는 이런 변화들이 쉽게 감지된다. 거리에는 커피숍, 헤어숍, 레스토랑 등이 대거 생겨났다. 커피 한잔에 3달러 하는 illy, Brown, Gloria Jean’s, Jana City 등의 다국적 커피숍은 젊은이들로 그득하다. 아이패드를 사용하는 사람도 적잖이 볼 수 있다. 밤거리가 밝아지고 여성들의 옷차림이 화려해졌다.
장기성 행장은 “저임금 기반 산업들의 성장이 기대되는 시기”라면서 “신규 거래를 타진하는 기업이나 소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상황이 이런만큼 KB는 올해는 프놈펜에 지점을 하나 더 늘릴 계획이다. 본점이 프놈펜 시내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신한도 올해중으로 중북부 지역에 새지점을 낼 방침이다.
▶ 내실이냐 성장이냐 = 시장이 무르익으면서 경쟁도 치열해지는 추세다. 캄보디아 정부는 여름까지 로컬은행의 자본금 기준을 3800만 달러로 3배가까이 높이기로 했다. 은행의 안전성을 높이고 흡수합병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그만큼 현지은행의 영업 여력이 높아지는 셈이기도 하다.
리테일 시장에 대한 외국 은행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기업금융만 관심을 갖던 중국의 공상은행이 영업확대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호주계 은행인 ANZ는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최근 몇년간 지점을 대폭 늘렸다. 프놈펜 시내에만 수십개의 ATM기기를 설치했다.
좀 처럼 움직이지 않던 일본계 은행들도 합작등의 형태로 현지 소매금융 시장 진출을 타진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8배에 달하는 공적개발원조(ODA)를 캄보디아에 퍼붇고 있다.
한 발 먼저 ‘길목을 지켜온’ 우리 은행들에게는 기회이자 도전의 시기가 다가오는 셈이다. 때문에 현지 전문가들은 한국은행들이 자본금을 확충하고 지점과 인력을 늘리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외형 확대에 나서야할 시기라고 조언한다.
<홍승완 기자 @Redswa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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