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재앙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이 세계시민으로서의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얽히고 설킨 역사 탓에 생긴 일본을 향한 구원(舊怨)은, 인력(人力)으로 감당할 수 없는 참사에 쓰러진 일본인 앞에 잠시 제쳐뒀다. 일본인의 강점이 ‘迷惑(메이와쿠)を 掛けるな(가케루나):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라면 한국인은 이번에 ‘患難相恤(환난상휼):이웃의 어려움을 함께 나눈다’는 정신과 ‘과거의 적을 사랑할 줄 아는 용기’를 발휘한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 관광 명소를 둘러보겠다는 오랜 설렘을 지진 피해지역 복구 자원봉사라는 용기와 맞바꾼 한국 네티즌을 향한 찬사가 줄을 잇고 있다. 삐딱한 댓글을 다는 네티즌에 준엄한 훈계도 이어지고, “나는 살고 싶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트위터에서 사라진 우치다 씨를 향해 “돌아오라”는 호소도 확산되고 있다.
15일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일본여행 카페에는 도쿄, 교토 등으로 여행을 가려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계획을 취소했다는 글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정부의 ‘여행 유의 지역’ 지정 이전이다. 아이디 ‘엘리’는 네이버 카페에 “주말 내내 (도쿄 도깨비 여행 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그것보다는 피해 입은 일본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며 “여행을 취소했고 그들의 상심한 마음이 치유되길 바란다”고 썼다.
아이디 ‘돌쇠갑빠’는 다음달 일본 자원봉사 떠난다고 알려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는 “이달은 아직 구조대도 복구작업을 못한다고 해서 4월 10일 이후로 신청했다”고 하자 네티즌들은 ‘구조대 참여는 생각도 못했는데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수퍼뚱땡)고 격려했다.
참사를 고소해하는 악플러를 향한 일반 트위터리안과 유명인사의 훈계와 자정노력도 한국인의 SNS 문화를 성숙함으로 이끈다.‘지진은 일본의 업보’라는 식의 트위터가 퍼지자, 상당수 트위터리안들은 자제를 당부하며 1차 저지에 나섰다. 가수 김장훈도 “독도 문제는 ‘가시’와 같지만 지진 피해와 별개”라며 “많이 배워서 아름다운 어른 되시기 바란다”고 써 악플러들에게 진심어린 훈계를 했다.
이와는 별도로 지진 발생 하루 전 최대 피해 지역인 미야기 현 센다이 시로 이사한 뒤 “나는 죽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끝으로 트위터 활동을 멈춰 참사로 희생당한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는 우치다 씨를 향해 다수의 한국인도 ‘트위터로 제발 돌아와. 꼭 살아있으리라 믿어’라며 응원을 보냈다. 19명을 팔로잉하는 우치다(uchida0hige)의 팔로어는 본지 보도 이후 급증, 1만1000명에 달하고 있다.
무엇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만행의 피해자인 정신대 할머니들의 결정엔 숙연함마저 느껴진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이날 침묵과 함께 일본 대지진 희생자에 애도를 표했다. 수요집회를 멈춘 것은 1995년 고베 지진에 이어 두 번째이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본을 향한 한국인의 성숙함에 대해 “대자연의 재앙 앞에 모든 인류가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며 “한국인들의 구호와 따뜻한 손길이 단번에 그간의 껄끄러웠던 관계를 개선하리라 기대하는 건 무리이지만, ‘일본인들과 터놓고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 해보는 계기로 삼는 것도 좋겠다”고 했다.
홍성원ㆍ백웅기 기자/hon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