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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범신, “은교, 여린은 영원한 가치”
“작가노릇, 지금까지 정확하게 38년을 했는데 앞으로 30년이 더 남았다면 이제부터 뭔가 다시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작가로서 스스로 무르익었다고 느낀다. 이제 온갖 테크닉도 마음대로 두려움 없이 구사할 수 있고, 쓸거리도 여전히 넘친다. 무엇을 쓸지 모르겠다는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작가생활 39년째인 소설가 박범신(67)이 39번째 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문예중앙)를 내면서 밝힌 포부가 마치 갓 등단한 20대 청년 같다. 끊임없이 자기 갱신을 해온 작가의 또 다른 펄떡임이다.

살인이라는 불편한 소재를 ‘어느 날 손바닥에 말굽이 생긴 사나이’를 내세워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꿰어나간 작가는 추악하고 구조화된 폭력적 현실을 존재론적 밑바닥까지 훑어낸다.

작가는 뜨겁고 팽팽하고 가혹하고 생생한 날것의 현실과 고요와 서늘함, 맑고 깊은 초월적인 것, 두 실을 한줄로 꼬아 무늬를 만들어 나간다.

나는 개장수의 아들이다. 특수부대 장교들이 몰려와 개를 패며 폭력의 본능을 풀고 먹는 게 나의 집이다. 나는 그런 집이 불타 없어졌으면 싶다. 다만 이웃집 맹인의 딸 여린으로 인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여린과 사귄다며 맹인에게 얻어터진 날, 맹인의 집에 불이 난다. 부나비처럼 불에 뛰어들어 소녀와 아버지를 구하지만 방화범으로 몰려 4년 감옥살이 끝에 노숙자로 떠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오게 된 곳은 살던 곳. 그곳엔 원룸 건물 샹그리라가 들어서 있다. 그곳엔 꿈에도 잊지 못할, 여린이 맹인 안마사로 있다. 눈가 보랏빛 점을 보는 순간, 나는 심연에서 하나하나 기억들을 끄집어올린다.

소설의 공간은 두 축으로 이뤄진다. 원룸의 주인, 이사장이 현실적으로 생활하는 샹그리라와 그가 운영하고 교주 격으로 있는 절, 안명진사다. 사람들의 눈을 밝혀주고 병을 치유해준다는 곳이다. 이사장의 몸은 검투사처럼 잘 발달된 근육으로 다져져 있다. 어느 순간 나는 문득 이사장의 눈빛이 낯익다고 느낀다. 섬광처럼 어린시절, 개끈을 놓아줬다고 나를 개 패듯 팼던 특수장교의 눈빛과 겹쳐진다. 그리고 나의 손바닥 말굽이 꿈틀거린다. 살인본능이다. 어느 날 손바닥에 생겨난 말굽은 사람을 처리할 때마다 손금을 먹으며 더 단단해지고 대신 손은 작아진다.

작가는 소설공간과 인물들을 아이러니로 엮어간다. 이사장의 건강한 몸은 자본주의의 번지르르한 얼굴을, 진짜 주름투성이 얼굴은 생리적 존재의 모습이다. 샹그리라나 안명진사 역시 말이 담고 있는 낙원이나 개안과는 먼 죽음과 폭력의 장소일 뿐이다. 말굽 사나이인 나는 살인자지만 어떤 슬픔, 알 수 없는 근원적 슬픔에 자주 눈물을 흘린다. 관음보살로 불리는 해맑은 애기보살과 해사한 여인 여린은 구원의 순수성을 표방하지만 실은 이사장의 성놀잇감일 뿐이다. 더 결정적 아이러니는 손에 박인 말굽이다. 발이 곧 손이란 얘기다. 손이 인간의 역사를 바꾼 생산, 도구와 연결돼 발전을 의미한다면, 발은 원초적이고 존재와 닿아있다.

작가가 “자본주의의 폭력을 탄생 이전의 슬픔에 비끌어 매는 건 내 나이가 시킨 짓”이라고 한 말은 이런 뜻으로 읽힌다. 그 나이에만 볼 수 있는 것, 그건 아이러니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여린의 존재는 전작 ‘은교’와 겹쳐진다. 작가는 “쓰다보니 어느새 은교의 구조가 들어와 있더라. 여린은 은교 같은 것이다. 진선미를 갖춘 영원한 가치죠.”


살인들이 차갑고 서늘하며 때로는 구역질나게 만들지만 피가 낭자한 하드코어와 다른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오는 7월 말로 명지대에서 정년퇴임하는 작가는 고향인 논산에 내려가 소설을 쓰겠다고 밝혔다.“소설 한 권 쓴 것 같은 느낌으로 지나간 것 같다”는 그는 “머릿속에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다. 질주를 멈출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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