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를 저지르고 유유히 해외로 도주해 잘먹고 잘사던 범죄자들의 모습은 이제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겠다. 정부가 유사수신이나 다단계, 인터넷 소액사기 등 서민을 상대로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피한 경제사범들에 대해 여권을 무효화 하는 등 강경히 대응할 방침이다. 필리핀과 베트남 등에서는 비자 효력도 정지돼 함부로 해외로 도주할 경우 국내 못지않은 괴로운 도피생활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경찰청은 다수 서민을 상대로 유사수신이나 소액 사기 등 범죄를 저지르고 국외로 도피한 사범을 우선 송환하기로 하고 최근 외교통상부 등 관계기관과 협의를 마쳤다고 24일 밝혔다.
유사수신 등 소액 다중 사기 범죄는 서민에게 경제적 손실을 안겨주는 중범죄이지만 국내와 해외 법 집행기관 및 인터폴 등과 협력이 필요한 일반적인 국제범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죄질이 약해 해외로 도피하면 법 집행의 사각지대로 놓여왔다.
경찰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민을 대상으로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피한 사범이 소지한 여권을 무효화 하기로 하고 외교통상부와 구체적인 실행방안에 대한 협의를 완료했다.
양 기관의 협의안이 실행되면 해외 주재 공관은 여권법과 여권법 시행령에 따라범죄 혐의자의 여권 발급·재발급 요청을 조만간 거부·제한할 수 있게 된다.
또 사용기한이 남은 여권에 대해 반납 명령을 내릴 수도 있게 된다. 즉 여권 분실 시 재발급이 안 되고 기한이 만료되면 연장도 차단돼 현지에서 외국인으로서 자신을 입증할 수 있는 신분증이 사라지게 된다.
경찰청 고위관계자는 “여권법과 동법 시행령 상 이 같은 조치는 기존에도 가능했지만 실제 실행되는 사례는 매우 제한적이었다”면서 “서민 대상 범죄의 심각성을 감안해 법 적용 범위를 넓히고 처벌 강도도 높인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대상범죄는 유사수신과 다단계 사기 등 서민 상대 다액 경제사범, 인터넷 소액결제 사기 사범, 우리 국민을 외국으로 유인해 납치·감금 후 금품을 갈취하는 해외거점 조직폭력 및 인질강도범이다.
경찰이 외교부에 범죄인 명부를 제출하고 이 같은 조치를 요청하면 외교부가 해외 공관과 해당국 정부에 명단을 통보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필리핀이나 베트남 등 국가의 경우 여권 무효화와 동시에 비자까지 동시에 취소돼 현지에서도 국내와 다름 없이 주거ㆍ이동 등의 자유를 제약받는다.
경찰은 이와 함께 주요국을 대상으로 한국인 도피사범 추적전담수사팀을 설치하는 방안도 동시 추진하기로 했다.
경찰청 고위관계자는 “여권 무효화 등 조치는 경찰이 요청하지만 외교부가 재외국민 보호 등 가치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할 것”이라면서 “다만 외교부가 서민 대상 범죄의 심각성을 고려해 전향적인 관점에서 처리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김재현 기자/madpe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