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는 지난 2006년 4월 보건대 학생의 총학생회 선거 투표권 부여를 주장하며 교수들을 감금한 5명의 학생에게 출교 처분을 내렸다. 학생들은 법원에 출교 무효 확인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징계가 절차상 정당성을 잃었다’며 학생 손을 들어줬다.
고려대가 출교 무효 확인 청구 소송에서 패소한 가장 큰 이유는 ‘절차상의 하자’였다. 법원은 학교가 학생들에게 충분한 소명의 기회를 주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감금 사태가 발생한 지 2주 만에 학생들에게 최고 수준의 징계인 ‘출교’처분을 내린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고려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절차의 정당성’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이 사건을 다시금 언급하는 이유는 지난 5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의대생 성추행’ 사건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80여일이 다 돼 가지만 학교 측은 가해학생에 대한 징계 내용과 수준을 결정하지 못했다. 고려대 관계자는 늑장 대응의 원인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절차상의 하자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답하며 2006년 출교 사태를 언급했다.
이 관계자는 “가해 학생들이 호화 로펌 소속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학교가 어떤 처벌을 내려도 가처분신청 등 반발이 예상된다. 여론은 출교를 원하고 있지만 섣불리 결정을 하면 학교가 패소할 수 있다”며 “학생들에게 충분한 소명 기회를 줘야 한다. 출석을 안 하고 (상벌위를) 진행시킬 경우 절차상의 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규정상 고려대는 절차를 ‘잘’ 지키고 있는 게 사실이다. 교내 양성평등센터 자체조사도 60일이라는 규정 내 기한 동안 이뤄졌고 당사자에게 재심의 요청 여부를 묻기도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상벌위를 열었다.
하지만 고려대의 이 같은 행보를 신중함으로 해석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미 기소된 학생들은 상벌위에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인데 학교 측은 “충분한 소명 기회”를 운운하고 있다. 상벌위가 구치소에서 이뤄지거나 법원이 상벌위 일정을 위해 형집행정지를 내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일각에서 고려대가 법원이 내릴 양형에 따라 징계 수준을 조절하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절차는 중요하다. 하지만 변명이 돼선 안 된다. 흘러간 지난 80여일은 절차를 통해 당사자의 충분한 소명을 듣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젠 다신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내부 시스템을 정비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백여년간 지켜온 국내 명문 사학의 품위와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박수진 기자/sjp10@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