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성명서
“불법과 부정으로 점철된 서울시의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규탄한다!”
현재 우리 민주주의는 유례없는 도전을 맞고 있다. 오세훈 서울 시장은 그 추한 서명인 명부를 전시하며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80만 서울시민’의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오시장의 주민투표 발의는 우리 헌법에 대한 모욕이며, 인권에 대한 경멸이며, 법치주의의 유린이며, 민주주의의 찬탈이다.
우리 헌법은 무상 의무교육을 명백하게 밝혀 놓았다. 이는 다같이 ‘학생’이 되고자 하였던 우리 선조들의 꿈이며, 신분 차별의 시대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시대를 위해 보통교육을 도입한 근대 문명의 오래된 이상이다. 교육은 자유를 가능케하고, 학교는 공동체를 가능케한다. 더욱이 학교급식률이 99%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학교급식은 교육의 필수 구성부분이다. 급식비가 의무교육의 무상성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은 우리 헌법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아이들이 급식을 받기 전에 ‘가난의 인증’을 먼저 받기를 강요하는 것은 비정한 일이며, ‘무상급식=부자급식’, 혹은 ‘무상급식=세금급식’이라고 선전하는 일은 아이들 가슴에 선을 긋고 낙인을 찍는 잔인한 일이다. 아이들이 배움의 공동체와 공통의 학교생활을 통하여 사회적 삶의 근원적 경험, 즉 우정과 환대라는 인간적 가치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공정한 협력체계로서의 우리 사회의 미래는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다. 의무교육의 급식은 기본급식이며 공통급식이지, 불쌍한 이들에게 베푸는 무료급식이 아니다.
모든 공공재 및 가치재가 그렇듯이, 의무교육은 세금에 의하여 공공적으로 운영되는 것이며, 모든 아이들이 너나 없이 고루 향유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관한 헌법상의 기본권이며, 국가는 그 실현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발전하면서 의무교육의 범위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 연장되었고, 그 무상성의 범위도 수업료 면제에서 급식비까지 확대되어 온 것이다. 향후 고등학교 급식, 아동 보육, 그리고 체험활동비, 수학여행비 등으로 더욱 확대될 추세에 있다.
마침 지난 지방선거에서는 서울시 교육감은 물론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세운 대부분의 시의회 의원들과 구청장들이 당선되었다. 서울시 교육청은 2011년부터 2014년에 이르기까지 연차별로 보편적 무상급식을 확대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시의회는 그에 대한 예산 지원을 위해 “의무교육기관에 대한 무상급식은 초등학교에 대해서는 2011년부터, 중학교는 2012년부터 시행한다”는 조례를 제정하였다. 이 조례는 시장의 거부권행사에도 불구하고 절대다수결로 재의결되어 확정된 바 있다. 이렇듯 보편적 무상급식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실행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오세훈 시장은 그에 맞서 위의 조례가 법률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대법원에 제소하였다. 물론 이 또한 지방자치법 상 가능한 조치이고, 대의제 민주주의 권력분립에 따른 견제와 균형의 원리라고 할 것이다. 헌법상의 민주적 절차를 존중한다면, 이제 재판을 기다려야 할 일이다. 그리고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그 조례는 엄연히 유효한 것이며, 따라서 그에 따라 일단 학교 급식계획은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세훈 시장은 다시 주민투표를 사주하였다. 말하자면, 일단 확정된 조례를 주민투표를 통하여 무력화시키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조례의 효력은 대법원에 제소함으로써만 다툴 수 있게 한 지방자치법과 재판 중인 사항에 대하여는 주민투표를 금지한 주민투표법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나아가 주민청구에 의한 주민투표의 경우 공정한 관리자가 되어야 할 시장이 사실상 주민투표를 선동하고 지휘하였으니 이는 주민투표제도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일 따름이다.
나아가 이번 주민투표 청구의 서명작업은 희대의 불법부정 경연장과 같았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21세기 대명천지에 그런 일이 발생하였다니, 수치이자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서울시의 전산조회만으로도 32%의 서명이 무효로 판독되었고, 짧은 시일 동안의 부분적 열람에서 13만 4천 여 건의 불법무효 서명이 발견되었다면, 이번 서명 명부는 마땅히 전수조사를 했어야 한다. 만약 전수조사를 회피하기 위하여 80만명이라는 대규모 서명을 작출한 것이라면, 그 청구 행위 자체가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불법적인 의도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 주민투표는 수리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명수만 채웠으니 됐다는 식으로 수리하였으니, 이는 확인의무를 다하지 않고 위법한 청구를 도운 불법적 행정작용이라고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서명 작업은 법령에서 정한 양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청구인 대표자의 의사가 전달될 수 있게 하고, 서명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불법 대리 서명을 방지하고, 검증 및 확인 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법적 장치들을 모두 회피한 것이다. 주민투표 청구행위는 그러한 법정 양식에 의할 때 비로소 법적 효과가 생기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서명들은 법적 요건을 결여하여 무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서울시는 이 경우에도 ‘문제없음’이라고 판정해 주었으니, 이 역시 법치행정이 아니라 불법행정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이번 주민투표의 청구대상 혹은 청구취지는 계속하여 변경되어 그 실체를 알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서울시가 처음에 청구인대표자증명서를 교부하고 그 사실을 공표할 당시에는 ‘전면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라고 하였는데, 이후 서명작업 및 청구사실 공표에서는 ‘소득하위 50%의 학생을 대상으로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안과 소득구분 없이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초등학교(2011년), 중학교(2012년)에서 전면적으로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안 중 선택하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다시 최종 주민투표 발의 공고에서는 그 선택지 앞에 “무상급식의 지원범위에 관하여”라는 문구가 삽입되었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무상급식에 대한 찬반투표였다가, 두 번 째에는 무상급식의 ‘방안’에 대한 선택투표였다가, 세 번 째에는 무상급식의 ‘지원 범위’에 대한 투표로 변신해 간 것이다.
이와 같은 청구대상 혹은 청구취지의 변화는 주민투표의 법적 효과를 모호하게 만들어, 주민투표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능임을 시사한다. 청구인들의 의사와 서명인의 의사가 다르고, 서명인의 의사와 투표인들의 의사가 다르고, 투표인들은 서로 다른 대상을 생각하며 투표를 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중대한 변경이 어떤 공식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은근슬쩍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이번 주민투표는 시민들에 의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서울시와 청구인 대표자의 부정담합에 불과한 것이다.
나아가 그 선택형의 경우도 적법한 주민투표로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이 무상급식의 ‘방안’에 대한 선택형 투표라면, 학교급식의 주무관청은 서울시가 아니라 서울교육청이고, 교육에 관한 사무에서는 교육장이 지자체의 장을 대신한다고 할 때, 서울시장이 이번 주민투표를 발의한 것은 적법한 발의자에 의한 주민투표가 아니다. 설사 발의자가 서울시장이 될 수 있다고 하여도, 위의 선택지들은 서울교육청의 무상급식 계획과는 관계없는 새로운 방안들이므로, 이는 주민투표가 아니라 주민발안이 된다. 주민투표와 주민발안을 명백하게 구분한 지방자치법에 반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것이 무상급식의 ‘방안’이 아니라 무상급식의 ‘지원범위’에 대한 투표라면 그것은 단지 예산에 관한 사항일 뿐이어서 역시 주민투표법 상 허용되지 않는다. 예산의 획정을 어떻게 매번 주민투표에 부칠 수 있겠는가?
또한 이른바 서울시장의 안이라고 얘기되는 “소득 하위 50%의 학생들에 대한 무상급식”의 방안은 학교급식법을 개폐하는 의미가 있다. 학교급식법에는 국가와 지자체가 급식비의 일부 또는 전부를 지원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일부를 지원할 경우에는 ‘기초생활보장법상의 수급권자, 차상위계층에 속하는 자, 한부모가족지원법에 의한 보호대상자, 도서벽지의 학교 재학생, 농어촌학교와 그에 준하는 지역의 재학생 그리고 교육감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우선적으로 실시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여기에 50%라는 임의적 숫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률상의 기준을 무시하고 새로운 자의적 기준을 세우는 주민투표가 허용될 수는 없다.
아울러 이번 주민투표는 말은 ‘선택형’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서울시민들의 선택의 폭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학교급식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서울 교육청의 계획인, 2011년 초등학교 전학년, 2012년 중1, 2013년 중2, 2014년 중3학년까지의 단계적 확대 방안이 선택지에서 배제되어 있으며, 선별적 무상급식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소득 하위 50%가 아니라 하위 30% 혹은 하위 70%로 할 가능성, 또는 소득 하위 50%라고 하여도 초중고 전학교가 아니라 의무교육인 초중학교에 한정할 가능성, 또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앞서 본 바와 같은 기초생활수급권자와 같은 객관적인 기준에 의한 선별 등 여러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모두 배제하고 있다.
게다가 이번 주민투표의 본질은 결국 선별급식과 전체급식 사이에서의 선택일 것인데, 정작 투표문안에 ‘선별’과 ‘전체’라는 말은 없고, ‘단계적’과 ‘전면적’이라는 표현만 있다. 결국 핵심 논점은 감추고 ‘단계적 무상급식’과 ‘전면적 무상급식’ 사이의 선택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결국 서울 시민들은 무상급식에 대한 여러 선택의 가능성을 봉쇄당하고, 또 문제의 본질인 보편적 무상급식에 대한 결정이 아니라 서울시장 측의 프레임 속에 갇혀 선택을 강요당하는 셈이다.
결국 이번 주민투표는 무상급식에 대한 투표라고 하면서 무상급식의 최선책에 대한 성찰과는 관계없는 것이 되었다. 서울시장의 각본과 각색에 맞추어진 ‘주민 동원의 무대’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단지 주민을 미혹케하고 주민을 이용하는 정치일 따름이다. 서울시 최초의 주민투표가 직접민주주의의 훌륭한 모델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사유화, 민주주의의 타락의 선례가 되고 있다.
이번 투표가 그대로 실시된다면 이는 서울시, 아니 대한민국 민주 헌정사의 큰 오점이자, 향후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협하는 불길한 전조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사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법원의 현명하고도 신속한 재판이 필요하다. 민주주의 최후 보루로서의 역할을 기대한다. 권력에 의하여 민의가 조작되고 민주주의가 침탈될 때, 법치주의가 농락당하고 인권이 조롱받을 때, 그것을 사법부가 외면한다면, 이는 단지 불법국가에 대한 방조에 불과할 것이다.
2011년 8월 11일
아이들의 대동의 삶과 공정한 민주사회를 염원하는
전국 법학교수 및 변호사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