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열린 24일 오전 7시, 오세훈 시장은 부인 송현옥(세종대 교수) 씨와 종로구 혜화동 자치회관을 찾았다. 자신의 운명을 건 한 표를 던지기 위해서다. 그는 “부모 세대에 누리기 위해서 자식 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오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날”이라고 정의했다.
오 시장은 이어 국립현충원을 찾아, ‘나라의 미래 위대한 시민정신’이라는 글귀를 방명록에 남겼다. 그가 이날 쏟아낸 말들은 비장함의 총아였다.
출발은 기대 이상이었다. 초반 투표율이 높아지면서 한껏 기대감이 높아졌다. 불과 일주일전만해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로 여겨졌던 ‘33.3%’는 숫자가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희망이 커졌다. 그러나 오전이 끝으로 달리면서 투표율은 힘을 잃었고, 결국 그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부인 송현옥 교수가 무상급식 주민투표일인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혜화동 제2투표소인 혜화동 자치회관에서 한표를 행사하고 있다. 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
서울시 관계자는 "아마 어제와 오늘이 오 시장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길고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라면서 "’초반 컸던 기대만큼 실망과 좌절도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시장의 부인 송현옥 씨는 지난해 6월 지방선거 개표 초반 패색이 짙자 남편에게 “어디로 이사갈까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다행히 오 시장이 역전 승리, 그 질문은 없던 일이 됐다.
과연 그가 어디에서 재기의 칼날을 갈 게 될까.
한편 오세훈 시장은 23일부터 왠만한 대선후보 저리 가라 할 만한 대장정을 벌였다.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서울 전역을 발로 뛴 그의 일정표에는 ‘이날 할 수 있는 건 다하고 천명을 기다려보자’는 심정이 절절히 묻어났다.
노량진 수산시장, 대방동 투표소, 광장시장, 강남역 지하상가, 중랑구 신내동 버스 공영차고지, 망우동 우림시장, 경동시장, 잠실야구장, 중곡종합사회복지관, 명동….
숨가쁘게 열거된 하루 일정 중 이날 밤 9시께 늦은 저녁식사를 할 때였다. 장소는 순대국밥집. 순대국밥과 함께 각 상 위에 준비돼 있던 막걸리 한 사발을 오 시장이 따라받자 참모진이 뛰어와 말렸다. 저녁 식사 후 명동에서 시민들을 만나는 일정이 아직 남아 있어 술은 안 된다는 거였다. 으레 예의상 술잔이라도 부딪힐 일이 많은 그가 이날은 참모들의 시기적절한 개입(?)으로 술잔에 손도 안 댔다. 시장을 비롯해 측근들 모두 겉으론 덤덤했지만, 속으로는 결연했다.
그도 긴장을 감추지 않았다. 식사 중 ‘지금까지 가장 떨리고 긴장된 순간이 언제였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지금”이라고 했다. 겉으로 덤덤한 모습을 보이면서 한편으로 생애 가장 무거운 중압감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투표 승리는 확신했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건 조용한 중도층의 ‘반란’이었다. 저녁식사 전 광진구 중곡종합사회복지관을 방문해 저소득층 자녀들의 방과후 학교 운영 현장을 둘러본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조용히 있던 중도층이 내일 투표에서 이 시대의 올바른 복지철학이 무엇인지 밝혀줄 것”이라고 당당히 힘줘 말했다.
이날 만난 시민들의 반응도 그를 고무시킨 듯했다. 오 시장은 ‘오늘 들은 가장 인상적인 말이 뭐냐’는 질문에 “시민들이 ‘걱정하지 마’라고들 했다. 스쳐 지나가는 상황에서 짧지만 명확한 메시지를 던져줬다”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그의 강행군은 주민투표 결과에 시장직을 연계하겠다고 발표한 21일 이후 22일과 23일 이틀간 이어졌다. 22일은 오전 11시에 시작해 오후 4시에 그쳤지만, 23일은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강행군을 벌였다.
밤 10시쯤 혜화동 시장공관으로 귀가한 그는 그곳에서 시장으로서 가장 긴 밤을 보냈을 것이다.
김수한 기자/sooha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