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겉으론 내색하진 않았지만, 배신감과 위기감이 교차한 무거운 얼굴 표정이 이따금씩 회의장 분위기를 짓눌렀다.” 청와대 관계자는 27일 오전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 분위기를 무겁게 전했다. 이 대통령이 단단히 화가 났다고 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이국철 SLS회장의 말은 소설같은 이야기’, ‘관련자들이 없다’, ‘개인비리에 국한되지 정권차원의 비리가 아니다’면서 측근비리에 선을 긋고 검찰수사에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했던 분위기를 싹 사라졌다.
최근 불거진 측근비리에 대한 이 대통령의 위기의식은 두가지로 압축된다.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공직기강 해외에 따른 ‘집권 4년차 증후군’이 보란듯이 재현되고 있는데다, 서울시장 선거를 코 앞에 둔 미묘한 시점으로 인해 집권여당에서 강력한 견제와 함께 당ㆍ청간 협력체제에도 균열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하는 정부’를 다짐했던 연초 구상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졌다고 이 대통령이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산저축은행 사태 이후 공직자와 권력은 가진 자들에 대한 이 대통령의 숱한 격노와 질책도 무색해졌다. 속된 말로 ‘말발’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장ㆍ차관 워크숍에서 저축은행 사태와 부처 향응 관행 등을 지적하며 “온통 나라 전체가 비리투성이 같다”며 공직사회에 만연한 비리와 구태를 크게 질책했다. 하루 전 라디오연설을 통해서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단호하게 부정과 비리를 척결해야 한다”고도 했다.
추상같은 이 발언들은 그러나 채 수 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부메랑이 되어 청와대를 정조준했고, 대통령의 령(令)은 순식간에 땅으로 떨어졌다. 이 대통령에게 특히 뼈아픈 것은 부정부패 척결이 이명박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와 공정사회 5대 추진과제에 포함될 정도로 국정의 핵심 과제임에도 최측근 참모들이 이를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이같은 위기의식에 따라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정권 차원의 비리의혹 정면돌파를 피력했다. 대통령은 이날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결심한 듯, “비리 척결”을 엄명했다. 측근 비리를 접할 때마다 개인의 문제라며 일축했던 기존 입장과는 180도 달라졌다.
더군다나 이날 국무회의는 내년 국가예산을 의결하는 자리였는데, 비리 엄단을 지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분석이다. 임태희 대통령 실장에게도 곧바로 법무장관과 경찰청장, 민정수석 등이 참석한 사정기관장 회의를 열어 비리척결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통상 사정기관장 회의에는 차관급들이 참석해왔으나 이 날 만큼은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 권재진 법무장관이 직접 회의에 참석키로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일회성 지적이나 관계기관 회의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면서 “비리 척결을 위한 TF 등을 당에서도 요구하고 있는 만큼 구체적인 기구 신설이나 제도화 방안 등이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 악재를 우려하고 있는 여당 내부의 쓴소리도 대통령의 사정 드라이브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이날 라디오연설에서 “저는 어제 청와대에, 이명박 대통령이 역사적으로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이 정부가 ‘깨끗한 정부’로 남기위해서는 청와대 뿐만 아니라 모든 권력 기관, 그리고 친인척, 측근들에 대해서 선제적으로 강력하게 비리문제에 대응해줄 것을 촉구했다”고 말했다.
<양춘병 기자@madamr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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