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이 솟아오르고, 부두에 선박이 줄을 서 있다. 번쩍이는 철도역도 새로 들어섰다. 북한이 지난달 22일부터 개최한 제 1차 라선국제상품전시회의 프레젠테이션 장면이다. 매년 평양에서 전람회를 열었던 북한이 올해 처음 중국ㆍ러시아 접경지역인 나선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국ㆍ러시아와의 경협에 성큼 다가섰다는 방증이다. 공식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은과 함께 북한의 개방은 가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외화벌이용’ 개방 성공적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이후 5ㆍ24조치로 남측과 경제교류가 끊긴 북측은 오랜 동맹국인 중국과의 교역을 대폭 강화했다. 지난 1월부터 7월까지 양국간 총 교역액은 30억9759만달러로 전년 동기대비 87.9% 상승했다. 지난해 대중 수입과 수출 모두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양국간 교역액은 올해도 사상 최대규모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러시아와도 가스관과 철도연결 사업, 대규모 경제지원과 식량원조 등에 대한 문제를 다각도로 논의하고 있으며, 개성과 금강산, 신의주, 나진ㆍ선봉을 중심으로 미국, 유럽 등지의 국가들과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개혁 없는 개방’이 다른 지역과 분야로도 확대될지는 미지수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최근 북한의 개방이 내부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됐다고 보고 있다. 박형중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중교역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광산물 수출 증가는 특권기관과 군대의 수입으로 흘러들어가고 장마당과 공장에는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북중경협의 성과물이 화폐개혁과 더불어 ‘김정일+김정은+장성택+신군부’로 상징되는 새 정치세력의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이다.
▶빈익부 부익부 심화
이같은 주장은 평양과 기타 지역의 빈부격차로도 힘을 얻고 있다. 특권계층이 주를 이루는 평양시민들의 삶의 질은 지난 몇년간 대폭 향상됐다. 일본의 민간단체 아시아프레스가 지난 6~7월 사이 촬영한 북한 내부 영상에 따르면, 평양 시내 곳곳에서 휴대폰 사용자와 외제차를 쉽게 볼 수 있다. 2008년 1800명이었던 북한 내 휴대폰 가입자는 현재 66만명으로 크게 늘었다. 평양의 뒷골목에서도 북한의 식량난을 무색케할만큼 다양한 음식들이 행인들을 붙잡는다.
반면 평양을 벗어난 기타 지역에서는 극심한 식량난과 화폐개혁으로 인한 피해의식이 팽배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화폐개혁은 김정은의 권력승계 전략의 일환으로 당초 인플레이션 해소, 빈부격차 완화, 김정은 체제의 자금원 역할,김정은에 반하는 내부 세력 색출 등 다양한 목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화폐개혁 실패로 북한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장마당에서 식량과 의류 등 생필품이 사라졌다.
세종연구소 정성장 수석연구위원은 “주민들은 화폐개혁으로 인해 자신의 돈을 국가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반면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들, 특권 계층들이 밀집한 평양은 일년이 다르게 삶의 질이 향상하고 있어 일반 주민들의 피해의식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미국 농무부 산하 경제연구소가 “북한 주민의 영양분 섭취는 권장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시아 최저 수준”이라고 발표한 가운데, 북한의 사치품 수입액은 김정은 등장 이후 꾸준히 늘어났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윤상현 의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북한의 사치품 수입액은 2008년 2억7214만달러, 2009년 3억2253만달러, 2010년 4억4617만달러로 해마다 급증했다. 텔레비전, 모니터, 디지털카메라 등 전기기기 및 음향ㆍ영상설비가 가장 크게 증가했고, 승용차가 2년만에 두배로 늘어나 그 뒤를 이었다.
윤 의원은 “김정은 체제 구축에 대한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한 ‘선물 통치’”라고 주장했다.
▶북한인권법 잠자는 사이..“김정은 후계세습 과정서 北 인권 악화”
우리 국회에서 여야가 북한인권법 처리를 놓고 지루한 공방을 벌였던 지난 1년동안 북한은 김정은으로의 후계체제를 구축하면서 주민들에 대한 공포정치를 대폭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에 대한 감시의 고삐를 더욱 죄는 한편, 강성대국 건설을 위해 노동통제를 강화하는 등 광범위한 인권유린을 자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인권개선을 촉구하고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수 있는 북한인권법 처리가 장기간 미뤄지고 있어 정치권과 정부가 북한 인권개선을 위한 국제적 노력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
이규창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28일 발간된 ‘2011 남북법제연구’에서 “2009년 4월 헌법 개정 이후 지난 2년간의 북한 인권 상황을 평가한다면 ‘외형적인 인권 존중 표방, 내부적인 인권침해 심화’로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9년 4월의 헌법 개정은 김정은이 북한 정권의 후계자로 내정된 시점과 맞물려 있다.
이 연구위원은 북한이 헌법개정을 통해 파괴암해죄의 처벌을 사형으로 높이고 반민족범죄 같은 처벌유형을 신설하는 등 형법 조문을 고치는 한편, 퇴폐물의 반입 및 유포만을 처벌하던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보관행위도 처벌대상에 포함시켰다고 설명했다. 집단적 소동죄, 직무집행방해죄, 허위풍설 날조ㆍ유포죄에 관한 처벌도 강화했다. 또 전단(삐라), 영상물 등을 통한 외부정보 유통행위에 대한 공개처형이 늘고 탈북행위에 대한 단속과 처벌이 대폭 강화되는 등 정치적 권리에 대한 탄압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다른 한편으론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을 위해 2009년 물자소비기준법과 노동정량법을 제정하고, 인민경제계획법을 고치면서 주민들이 근로인권은 더욱 악화됐다는 설명이다. 이 연구위원은 “올해 신년 공동사설에서도 경제 관리를 개선하기 위해 모든 단위에서 계획규율, 재정규율 및 노동행정규율을 철저히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며 “북한은 강성대국 건설을 위해 주민들에게 경제건설을 가일층 독려하는 방향으로 노동법령 정비를 추진할 것으로 전망되며, 이 과정에서 근로자들의 노동인권은 더 열악한 상황에 내몰리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북한 당국의 인권유린에 대한 걱정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자 우리 정부와 정치권은 이에 대해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현재 국회 법사위에는 정부가 제출한 북한인권법이 여야간 대립속에 1년 넘게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정부 역시 국회에 제출한 북한인권법의 원안만을 고수한 채, 다른 노력은 적극적으로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나라당 윤상현 의원은 최근 통일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정부가 한 노력이 무엇이냐”며 북한 인권법 처리를 위해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것을 주문했다.
<안현태 기자 @godmarx>popo@heraldcorp.com
<김윤희 기자 @outofmap> worm@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