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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날위에 선 영포라인…
공직생활 마감한 SD·법의 심판대에 선 최시중·박영준 각종 비리연루 레임덕 부채질…한 시대 풍미한 권력의 허무한 종말
이상득
1992년 MB 정치입문 멘토역
영포라인의 시작과 끝

박영준
10년 가까이 SD 보좌관 역
MB정권 4년간 왕차관 군림

최시중
갤럽서 13년간 각종 여론조사
방통대군 무소불위 권력 휘둘러


최시중, 박영준. 이명박 정부 들어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핵심인물이 잇따라 구속됐다. 세상은 이들을 ‘영포라인’이라 부른다. 역대 대통령 주변에는 늘 핵심 측근 그룹이 존재해왔다. 5공화국의 ‘하나회’, 6공화국의 TK(대구경북)사단, 문민정부의 상도동계와 국민의정부 동교동계 그리고 참여정부의 친노그룹까지. 영포라인은 지역색을 띠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이 가운데 6공화국의 TK사단과 닮았다.

영포라인은 이명박 대통령(MB)과 이상득 국회의원(SD)의 고향인 영일ㆍ포항 일대 출신 인사의 모임을 줄여서 한 말이다. 이름은 1980년 이 지역 모임인 영포회에서 비롯됐다. 최고권력자의 고향 모임이 어떤 과정으로 권력의 핵심이 됐을까.

▶가신(家臣) 박영준= MB가 정계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92년 국회의원 선거 때다. 그런데 지역구 의원이 아니라 당시 민자당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았다. 당시만 해도 비례대표는 정치적 기반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정당 기부금 등을 많이 내면 도전할 수 있는 자리였다.

MB의 형인 SD는 1988년 영일ㆍ울릉군에서 당선되면서 국회의원을 시작했다. 초선이지만 당시 여권의 아성이던 경북지역에서 공천을 받았다는 점만으로도 당내 상당한 정치적 기반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2년 동생인 MB가 비례대표 공천을 받는 데도 형의 힘이 작용했다는 게 정설이다.

MB는 15대 199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에 출마, 당시 정치 베테랑이었던 이종찬 씨와 청문회 스타 노무현 전 대통령를 꺾고 두 번째 금배지를 단다. 정치1번지라고 여겨지는 종로에서 당선됨으로써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런데 이 해 MB의 당시 비서관이었던 김유찬 씨가 선거법 위반(법정선거비용 초과 사용) 의혹을 폭로했고, 이 일로 MB는 1998년 국회의원직을 자진사퇴한다. 사퇴와 함께 서울시장 출마도 선언했지만 당 후보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던 MB는 불과 4년 뒤인 2002년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로 화려하게 재기한다. ‘청계천 복원’이 동력이었다. 하지만 4년간이나 원외에 머물러있던 그가 서울시장 후보로 추대된 데는 당시 무려 4선 국회의원이었던 SD의 정치력이 크게 작용했다.

서울시장 당선과 함께 1994년부터 10년 가까이 SD의 보좌관을 지냈던 박영준 전 차관이 직무인수위원회 위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국회의원부터 서울시장까지 SD가 동생의 든든한 정치적 멘토 역할은 물론 참모까지 공급해준 셈이다.

▶동지 최시중=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의 경우도 역시 첫 고리는 SD에서부터 출발한다. 최 전 위원장은 SD의 고향 2년 후배인 동시에 서울대학교 후배다. 동아일보에서 정치부 기자로 성장하던 최 전 위원장은 1988년 동아일보 정치부장이 된다. SD가 초선으로 국회에 입성하던 때다. 이후 논설위원과 부국장을 거쳐 1994년 한국갤럽조사연구소 회장이 된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여론조사기관이 많지 않았던 때여서 갤럽의 여론조사 영향력은 상당했다. 1994년에서 2007년까지 무려 13년간 최 전 위원장이 갤럽 회장을 역임할 동안 MB는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와 서울시장 선거에서 두 차례의 승리를 거둔다.

2007년 MB가 박근혜 전 대표를 꺾고 대통령 후보가 되는 데도 SD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2003년 대선 패배 이후 탄핵정국을 겪으며 상당수 의석을 잃은 한나라당은 재보궐선거에서 잇단 승리를 거두면서 정국 주도권을 회복했고, 이 과정에서 박 대표는 유력한 대선후보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의 치적으로 여론조사에서 돌풍을 일으킨 MB가 극적으로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긴다. 정치권에서는 SD의 역할이, 여론 분야에서는 최 전 위원장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2007년 최 전 위원장은 이명박 대선후보 캠프에 합류해 후보 경선 승리를 이끌고, 이후 대선 승리 뒤 대통령직 인수위원을 거쳐 방송통신위원장에 오른다.

▶권력의 핵심으로= 2007년 대선 전에도 영포라인은 존재했다. 하지만 이전까지 영포라인의 핵심은 내용상이나 형식상 모두 SD였다. 하지만 대선을 계기로 영포라인의 형식적 핵심은 MB로 바뀐다. 영포라인이 청와대 요직에 포진됐기 때문이다. 특히 박 전 차관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으로 동생과 형의 중요한 연결고리까지 겸했다.

최 전 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장관급의 방송통신위원장으로 국정홍보처가 폐지되면서 공백이 생긴 정부의 대언론정책을 사실상 총괄했다. 정부조직상 신문은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이지만, 당시에는 주요 신문매체가 종합편성채널 및 보도전문채널을 노리던 시기라 인허가권을 쥔 최 전 위원장이 사실상 대형 언론사에는 최고의 ‘갑(甲)’이었다.

하지만 대선 직후까지만 해도 영포라인의 실체는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대통령의 고향인맥 정도였다. 그런데 정권 초반 이른바 영포라인과 한나라당 내 소장파 친이계 사이가 틀어진다. 이른바 개국공신 간 권력다툼이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친이계 인사가 권력 주변부로 물러나게 되고, 실권은 영포라인에 돌아간다. 박 전 차관도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1급 상당)에서 국정 전반에 참여할 수 있는 국무총리실차장(차관급)으로 승진하며 권력 전면에 나선다.

▶화무십일홍= 2010년까지 기세등등했던 영포라인은 2010년 총리실 사찰 사건으로 첫 도전을 받는다. 이후 SLS그룹 로비 의혹과 카메룬 다이아몬드 사건 등을 겪으며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가장 치명타는 올 초 터진 파이시티 인허가와 관련된 비리 의혹이다. 이 사건이 치명적인 이유는 전형적인 ‘영포의 비리’라는 점이다.

권력의 핵심에 있던 영포라인이 결국 해당지역 기업의 뒤를 봐줬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국권력으로서의 정당성이 훼손당했기 때문이다. 파이시티와 연루된 기업은 모두 포항 일대 기업이고, 특히 대기업 포스코까지 연루되면서 영포라인의 권력이 올바르지 않은 곳에 사용됐다는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특히 대통령 임기가 불과 채 1년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터진 이 같은 의혹은 영포라인의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다. 야권의 공세야 당연하지만 심지어 여권에도 대통령과의 거리두기에 나서며 레임덕 현상을 부채질할 빌미를 줬다. 특히 영포라인에 밀렸던 여권 내 친이 소장파의 경우 영포라인에 대한 ‘앙금’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 덕분에 검찰도 현직 권력핵심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법원이 공소시효 등의 논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최 전 위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박 전 차관의 구속도 신속하게 처리한 점은 이를 방증한다. 지난 19대 총선 불출마 선언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한 SD, 법의 심판을 피해갈 수 없게 된 최ㆍ박 두 사람 그리고 끝을 향해 달려가는 정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포라인은 이렇게 저물고 있다.

홍길용 기자/ky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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