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지출·稅감면대상 축소-지하경제 양성화
제도개편따른 세수확충만으론 턱없이 부족
비과세 확대 등 증세도입땐 조세저항 불가피
공약수정-복지범위 축소 ‘양자택일’ 기로에
박근혜 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세금과의 전쟁’에 나서야 할 판이다. 대선 과정에서 ‘경제민주화’와 ‘공정경제’를 내세웠던 만큼 양극화와 복지정책 실행을 위해 세금을 더 걷어서라도 일전(一戰)이 불가피한 상태다. 대선 직후인 지난달 28일 여야가 국회 조세개혁특위를 설치키로 합의한 것은 올부터 시행될 복지확대정책을 위한 ‘증세’의 신호탄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박 당선인은 국민부담 최소화를 내세우며 ‘증세는 없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학계와 정치권은 현재까지 내놓은 각종 복지정책을 시행하기 위해선 직접 증세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라 입을 모으고 있다. 결국은 ‘복지 공약’을 수정하든지, ‘증세’를 선택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참 쉬운 134조원 조달대책=134조원짜리 공약을 발표한 박 당선인의 복지재원 마련 대책의 핵심은 두 가지다. 정부지출 축소와 세금감면 혜택 대상을 줄여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 박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정부 씀씀이를 줄여 5년간 71조원(연 14조원 가량)을, 세금감면 대상을 줄여 48조원(연 9조6000억원)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지하경제 양성화 등을 통해 나머지 재원을 조달하겠다는 복안이다. 이와 관련, 국회 기재위 소속 홍일표 새누리당 의원은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약 1조6000억원, 금융소득 과세 강화 등을 통해 4조5000억원, 공공부문 개혁을 통한 세외수입 증대로 1년에 1조원씩 해서 모두 53조원을 조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녹록지 않은 현실=우선 정부 씀씀이를 줄이겠다는 계획은 예산담당 부처인 기획재정부조차 난감해 하는 형국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정부지출 가운데 상당 부분이 월급 등 경직성 예산이다. 포기할 수 있는 대형 국책사업도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 정부 씀씀이를 줄여 매년 14조원의 재원을 마련한다는 계획도 현실성이 높지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세제 혜택을 줄여 거둘 세입 증대에도 한계가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 2008~2010년 사이 법인세 총 감면액은 21조2484억원으로 연간 7조원가량이다. 그러나 이를 일시에 모두 삭감할 경우 법인들의 조세저항이 거셀 것이 뻔하고, 그렇게 감면액을 모두 세수로 확보한다 하더라도 재원 마련 목표(9조6000억원)에는 2조원 이상 모자라는 수치다. 새누리당은 지난해 말 6조원의 국채를 발행해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세수만으론 재원 마련에 한계가 있음을 자인한 것이다.
국세청도 칼을 빼들었지만, 지금까지 못 걷은 세금을 마술을 부리듯 성과를 낼지 미지수다. 국세청은 가짜석유 유통 및 면세유 불법거래 근절 대책과 함께 고소득 자영업자 세무조사 확대도 추진키로 했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 금융정보분석원(FIU)의 자료 접근권을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나갈 곳은 많고=박 당선인이 대선 과정에서 내놨던 선심성 공약들도 다시 조명을 받는다. 복지를 위해선 재원 마련이 관건인데도 대선 과정에서 ‘표’를 의식해 각종 세금 공약들이 남발된 탓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기초노령연금’ 제도는 시행 시기 조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65세 이상 국민에게 매월 20만원씩을 지급하겠다는 이 제도는 매년 17조원의 재원이 필요하다. 서울시 한 해 예산이 약 20조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천문학적인 규모다. 이 외에도 박 당선인이 내세운 군복무 18개월 단축으로 인한 부사관 증원과 4대 중증질환 치료비 보장 등에도 조 단위의 예산이 소요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버스업계에 유류세 감면 공약을 내걸었던 것 역시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다. 새누리당은 대선 과정에서 버스업계의 ‘택시법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유류세 100% 감면과 에너지 빈곤층에 대한 유류세 감면을 약속했다. 중견기업에 중소기업 준하는 세금 혜택을 제공하겠다는 공약 역시 세수 감소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박 당선인 공약에는 ‘근로장려세제(EITC)’도 포함돼 있다. 이는 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인 계층에게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제도로, 당선인은 현재 EITC 지원 대상을 2인 가구에서 1인 가구로 확대할 계획이다. EITC제가 계획대로 실시될 경우 연간 2000억원 가량의 세수가 줄어들 전망이다.
▶제도 개편에 따른 세수증대는 ‘쥐꼬리’=정부와 여당은 세수증대를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세수증대 효과는 미적지근한 반면, 반발은 거셀 것으로 전망되면서 현실화까지는 갈 길이 먼 상태다.
박 당선인은 근로소득자의 비과세ㆍ감면 총액을 3000만원으로 줄이기로 했다. 기획재정부가 제안하고 새누리당이 이를 수용한 것이다. 이를 통한 세수증대 효과는 5000억~7000억원으로 추산된다. 개인사업자의 최저한세율 인상(35%→50%) 역시 재원 마련을 위한 고육지책의 일환이다. 예를 들어 연수익이 1억원인 개인사업자의 경우 부담해야 하는 세금은 2000만원이지만 각종 세액공제가 적용되면서 실제로는 700만원 가량의 세금만을 내게 된다. 최저한세율이 50%로 높아질 경우 세금은 1000만원가량으로 높아진다. 고소득자들의 거센 반발이 우려되는 이 방안을 통해 거둬들일 수 있는 추가 세수는 500억~1000억원으로 집계된다.
또 정치권은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을 40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낮추는 데 합의했고(추산 세수증대 1200억원), 대기업의 최저한세율(14%→16%) 인상(추산 세수증대 2000억원)에 대해서도 여야가 합의한 상태지만 여전히 수조원대에 이르는 복지 재원 마련에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한다. 파생상품거래세 도입은 업계의 반발로 일단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태다.
▶‘공약을 수정하든지, 복지 범위 줄이든지’=이 때문에 결국은 박 당선인이 ‘증세’를 고려치 않을 수 없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증세는 없다’는 대선 당시의 기조와 ‘복지’ 사이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치 않고서는 박 당선인이 겪고 있는 ‘세금 딜레마’를 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내에선 ‘공약 수정’ 움직임마저 감지된다. 심재철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최근 “돈 때문에 공약 이행이 현실적으로 어려운데 ‘과거의 관행이다. 국민의 관점이 아니다’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예산이 없는데 ‘공약이므로 공약대로 하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했다. 이른바 ‘공약 출구전략’이다.
나성린 의원도 최근 한 인터뷰에서 “기초노령연금을 65세 이상 노인 ‘전부’에게 지급한다고 한 적이 없다. 기초노령연금의 기초연금 전환은 올해부터 논의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국민을 우습게 보는지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원 마련이 어렵다고 해서 박 당선인이 쉽사리 공약을 바꿀 것이라 전망하기도 쉽지 않다. 그동안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을 강조해 왔던 박 당선인인 만큼 내걸었던 공약에 대해 가능하면 지키려 노력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결국은 다시 ‘증세’로 논의가 좁혀진다. 공약을 지키기 위해선 결국 직접적 해결책인 ‘증세’ 카드를 다시 꺼내들지 않겠냐는 전망이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복지를 위해선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른 국가와 비교해 출산율이 가장 낮고, 인구 고령화 진행이 빠르다”며 “현재 논의되고 있는 각종 공약을 이행키 위해선 직접 증세 외엔 답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라고 말했다.
홍석희기자 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