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수난사
대한민국 국회는 정부 권력을 견제할 국민의 대표집단이다. 하지만 그 역사는 결코 순탄치만 않았다. 대통령 권력에 의한 국회 수난사 시초는 6ㆍ25 전쟁 와중에 있었던 ‘부산 정치파동’을 꼽을 수 있다. 해방 후 1948년 미 군정 체제에서 총선거를 통해 들어선 제헌국회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위해 필요한 여러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초당적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1950년 6월에 들어선 2대 국회는 시작부터 대통령과 정면 충돌했다. 의회가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 시절, 야권의 압승에 재선이 어려워진 이승만 대통령은 6ㆍ25 전쟁 속에서 직선제 개헌을 꾀했다. 하지만 국회에서 개헌안을 거부하자, 정부는 1952년 5월 국회해산을 위해 부산을 중심으로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킨 것이다. 국회는 결국 그 해 7월 대통령직선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 국회안이 혼합된 ‘발췌개헌안’을 경찰과 군인의 지켜보는 가운데 기립표결 방식으로 통과시켰다.
이후 1954년 들어선 3대 국회도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은 이 대통령 3선을 위한 헌법 개정을 시도했다. 회유ㆍ협박을 통해 재적의원 3분의 2 의석을 확보한 뒤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야당의 격렬한 반대 속에 찬성 135표로 부결됐다. 하지만 이틀 뒤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논리로 이를 뒤집어 이를 토대로 이 대통령은 1955년 3선에 성공했다.
4ㆍ19 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은 의원 내각제를 채택, 그 어느 때보다도 국회 권력이 컸다. 하지만 이렇게 탄생한 5대 국회는 1961년 5ㆍ16 쿠데타로 임기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해산됐다. 3권을 장악한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꾸고 1963년 민정 이양 시까지 국회를 마비시켰다.
이후 국회는 사실상 ‘통법부’라는 오명 속에서 살았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 당선과 함께 출범한 6대 국회의 다수파인 민주공화당은 대통령의 권위적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에 급급했고, 1967년 들어선 7대 국회는 박 대통령의 3선을 위한 개헌 파동도 감수했다. 대통령을 위한 국회였던 셈이다.
이어 들어선 8대 국회는 결국 1972년 10월 17일 박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으로 해산되고 비상국무회의가 이를 대행하는 유신시대가 펼쳐진다. 헌법상 행정권 주체인 국무회의가 입법권과 유신헌법으로 일컫는 헌법개정 작업을 담당했다. 9대 국회는 아예 대통령이 뽑는 국회의원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유신정우회를 구성해 대통령의 국회 장악을 돕기도 했다.
10ㆍ26 사태로 박 대통령이 시해되고 이후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발효되면서 10대 국회도 해산됐다. 전두환 대통령은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헌정사상 3번째 과도입법기구를 통해 국회 권한을 대행하다, 이듬해 3월 총선으로 11대 국회가 들어섰다.
이 같은 역사를 거쳐 국회는 명실상부한 3권(입법ㆍ행정ㆍ사법)의 핵심 축으로 날로 권한을 강화해왔지만, 국민 기대에 어긋난 후진적인 행태로 인해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란 비판도 나오는 실정이다.
백웅기 기자/kgungi@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