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만에 열릴 뻔한 남북당국회담이 일단 결렬됐다. 이명박 정부 내내 대치하며 쌓인 앙금이 수석대표의 격(格) 논란으로 불거진 셈이다. 이미 장관급회담에서 당국회담으로 이름이 바뀔 때부터 조심이 심상치 않았는데, 뻔한 북한의 수법에 우리가 너무 순진하게 대응한 게 아닌가 여겨진다.
북한은 이번에도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내세웠다. 조평통은 정책을 담당하는 공식 국가기구가 아니다. 북한 당정의 고위급이 참여하는 노동당 외곽 사회단체다. 1951년 당시 부수상이었던 벽초 홍명희가 처음 만들었으며, 이후 북한의 권력 실세들이 위원장을 맡아왔다. 북한 정부와 노동당 중앙당에는 우리 개념의 통일전담 부서가 없다. 통일전선(戰線)부는 말 그대로 적화통일 개념의 통일을 지향하는 당조직이다. 우리식으로 따지면 국가정보원 대북담당부서 같은 역할이다. 그러다보니 남한 정부와 회담할 때는 늘 조평통이 나섰다. 공식 정부기구가 아니다보니 소속 대표들의 직급도 고무줄이다.
그럼 남북회담을 할 때마다 조평통의 ‘고무줄 직급 놀이’에 계속 휘둘려야 할까?
북한에 조평통이 있다면, 남한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있다. 대통령의 통일정책 전반과 남북간 교류협력에 대한 자문·건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1980년 설립된 헌법기관이다. 의장이 대통령이고, 수석부의장은 장관급이지만 역임자들을 보면 총리급 인사가 즐비하다. 사무처장도 현재 차관급이지만 출범 초에는 통일원장관이 겸임할 정도로 위상이 높다. 민주평통 직제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이니까, 필요하면 우리도 고무줄 직급 놀이를 할 수 있다.
북한에서 조평통 서기국장을 내세우면, 우리는 민주평통 사무처장으로 대응하면 된다. 민주평통 사무처장은 줄곧 통일부 출신 관료가 맡아왔으니 전문성에도 문제가 없다. 김양건에 노동당 비서 체면이 있다면, 류길재 통일부장관은 국무위원 체면이 있다.
수석대표의 격 논란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자존심이 걸려있다보니 한 쪽의 양보만 강요한다면 쉽게 풀리기 어렵다. 이럴 때는 양측 모두 고개를 끄덕일 묘안이 필요하다.
홍길용 기자ky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