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에는 을, 선거가 끝나면 슈퍼갑.’
우리나라에서 정치인들에 맞춤옷처럼 맞는 격언이다. 경제민주화, 을(乙) 지키기 등과 불공정한 갑을관계를 바로잡으려는 정치권의 노력이 한창이지만, 정작 정치인 본인들은 갑(甲)의 지위를 내려놓는 정치쇄신 움직임엔 미적거리는 모습이다.
황우여, 김한길 여야 대표가 지난 18일 콩나물국밥을 먹으면서 정치쇄신과 특권 내려놓기 법안 통과를 합의했지만,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흉내만 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양당 대표는 국회의원이 변호사나 교수직을 겸할 수 없게 했고, 회의 진행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 한 번이라도 폭력을 행사할 경우 해당 의원은 반드시 고발되는 방안을 6월 국회 중에 처리키로 했다. 또 단 하루라도 국회의원을 지내면 65세부터 120만원씩 자동 지급되는 의원연금도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국회의원 겸직을 금지하면서 매월 수백만원씩 판공비를 받아 쓸 수 있는 각종 체육회 회장직에 대해서도 허용했다. 현 의원 중엔 이병석(야구), 전병헌(e스포츠), 윤상현(축구), 신계륜(배드민턴), 신장용(배구), 김재원(컬링), 홍문표(하키) 등이 각종 체육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의원연금 역시 언제부터 적용할지 모호하다. 만약 19대 의원부터 적용하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공산이 크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 대선에 입이 닳도록 약속했던 세비 30% 삭감은 아예 논의에서 삭제됐다. 생계형 국회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여야 지도부는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다. ‘매관매직’으로 악용되고 있는 기초자치 단체장과 기초의회 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 폐지안도 양당의 대선공약이었지만 국회 처리는 오리무중이다.
새누리당은 4ㆍ24 재보선에서 공약을 실천했지만, 민주당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지방선거에서 정당정치의 가능성을 막아 책임정치 실현에도 지장을 준다는 논리로 반대하고 있다. 애초 정당공천제 폐지안은 공천권을 포함한 기득권 내려놓기나 현행 중앙공천제의 맹점에서 비롯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차원에서 논의가 이뤄졌지만, 이제는 정당공천제 폐지에 따른 득실을 따지는 쪽으로 변색됐다.
지난 3월 여야가 대선과 총선 때의 약속을 지키겠다면서 정치쇄신특별위원회까지 구성, 총 16개의 의제를 설정했지만, 모두 논의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도 이미 선거가 끝났기 때문이다. 선거 전과 선거 후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애초 정치권의 정치쇄신 공약은 ‘보호색’에 불과했다는 지적이 흘러나온다. 유권자 불만을 달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내건 구호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인민은 투표할 때만 주인이 되고, 선거만 끝나면 노예로 돌아간다”고 프랑스 정치철학자 장자크 루소가 일갈했던 데에서 얼마나 큰 진전을 이뤄낼지 주목할 일이다.
백웅기 기자/kgungi@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