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 여직원 댓글 의혹사건이 터졌을 때, 선거가 끝나면 정치권이 난장판이 될 거라고 ‘학습된 것처럼’ 예상했다. 상대의 말에 꼬리를 물고 따지는 초등학생처럼 옳고 그름이 꽤 분명한 문제까지 얼굴을 붉히고 싸움을 일삼는 모습이 국회 밖에서 본 ‘정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나가리라’고 여겼다. 극심한 갈등을 겪은 뒤에도, 시간이 흐르면, 또는 다른 큰 사건이 터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잊혀진 사례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7개월 후 ‘인턴기자’가 돼서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 안으로 들어갔다.
정당 회의장을 취재하던 중에 “지금 발언하는 의원 이름이 뭐죠?”라는 질문을 옆에 선 다른 기자에게 몇 번이나 반복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고 여겼는데, TV에서 본 정치인의 이름도 몰랐다. 부끄러웠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 또한 지나가겠지’라는 안도감이 불러온 결과다. 국회는 그저 모호한 실체였던 것이다. 정작 깊숙이 그 메커니즘을 들여다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탓이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촛불집회에 나섰다. 경제 양극화와 복지가 화두였던 18대 대선은 사상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결국 ‘나’의 생활과 연결될 때, 비로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다. 기우로 끝났지만 혹시 내가 광우병에 걸릴 수 있다는 두려움, 세금의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는 위기감같은 것이다. 정치에 대한 관심, 결국은 국민과의 접점이다. 취재현장에서 만난 그 국회의원, ‘나’와 직접 연관된 정치인이었다면 이름을 알았을 지도 모른다.
국회의원이 말하는 ‘국민’의 의미는 항상 모호하거나 왜곡됐. 국정원 국정조사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문제로 또 다시 극한 대립중인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한결같이 ‘국민의 분노’를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버릇처럼 붙이는 ‘국민’이라는 단어는 그들에게 ‘표를 던져 줄 수 있는 사람’이었고.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사람’이라는 본래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분노’하지 않는 이들, 자신의 편에 서지 않는 이들은 국민이 아니니까. 입버릇처럼 말하는 ‘국민’은 제대로 사용돼야한다.
정쟁을 하더라도, 국민을 위해, 국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 먼저 고민해보는 게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의 본분이 아닐까.
김하은 인턴기자(고려대 미디어학부 수료ㆍ08학번) khe020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