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망각 속도’는 ‘매월 0.8’이라는 연구가 있다. 10개의 사안 중 한달 후 기억에 남는 사안은 8개, 두달 후엔 6.4개, 석달 후엔 5.1개만 기억에 남고, 1년이 지난 뒤엔 고작 0.6개만이 기억에 남는다는 연구다.
정치권의 ‘망각 속도’는 이보다 훨씬 빠르다. 어제의 ‘핵심 이슈’는, 오늘 터진 다른 이슈에 묻히면서 불과 몇달 전 일은 ‘까마득한 과거의 일’로 잊혀지기 일쑤다. 문제는 정치권에 공히 이득이 되는 사안은 오래 기억돼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만, 득이 안되는 사안은 유독 그 망각 속도가 빠르다는 점이다.
‘벌써 1년’ 전 사안인 탓일까. 앞서거니 뒷서거니 경쟁적으로 대선 과정에서 내놨던 ‘공약의 기억’들은 ‘없던 것(無)’으로 무한 수렴해버렸다. 대표적인 것이 국회의원 세비삭감이다. 국회의원들이 받는 월급을 30% 줄이자는 것이 핵심인데, 지난달 30일 활동이 종료된 국회 정치쇄신특별위원회는 ‘세비 삭감’ 공약에 대해 아무런 결론도 내놓지 않았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아예 7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국회참석이 저조할 경우’라는 세비를 삭감하겠다는 조건을 하나 더 추가했다. 소속 의원들의 세비 삭감 반대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다.
정당 무공천 공약 역시 표류하고 있다. 민주당은 ‘정당 무공천’을 당론으로 확정했지만, 새누리당은 아직 당론으로 정당 무공천을 확정치 못하고 있다. 여야 모두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정당 무공천 공약이 올 정기국회에서 통과되기를 기대키는 어려울 전망이다.정치권이 기득권 포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비판은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그렇다고 정치권의 망각 속도가 항상 빠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정치권에 ‘득’ 되는 사안은 빠르게 처리되기도 한다. 최근 예산재정개혁특위는 예결위 상임위화에 합의했다. 상임위원장직이 하나 더 늘어나는 방안엔 여야 합의가 ‘신속히’ 이뤄진 것이다. 의석수를 늘리자는 주장도 나온다. 민주당 충청권 의원들은 지난달 30일 선거구 증설을 공식 요구했다. 인구 25만명을 넘는 선거구가 있기 때문에 의석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새누리당 역시 분위기가 무르 익으면 ‘밭이 좋은’ 지역의 의석 증설을 요구할 분위기다. 지난해 3월, 299석에서 300석으로 의석을 늘렸을 때 받았던 여론의 질타는 잊은지 오래다.
득되는 사안은 신속하게, 실이 되는 사안은 뭉개는 일이 여론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이유는 쏟아지는 새 이슈들 탓도 크다. 최근 사안만 모아보더라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사건,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건, 대화록 증발과 월급쟁이 세금폭탄 이슈, 기초연금 공약 후퇴,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사건,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자 문제 등이다. 일부는 정치권 스스로가, 일부는 국정원 등 외부에서 만들어진 이슈가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쏟아지는 이슈는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권의 ‘망각 속도’를 높이는 기제가 되고 있다.
홍석희기자 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