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닭 울음소리가 나서야 내관이 돌아오자 세종은 입고 있던 초구(수달가죽으로 만든 두루마기)를 얼른 벗어 덮어주라 이르고 그제야 침전에 듭니다. 이런 사실을 날이 밝은 뒤 안 신숙주는 뜨거운 눈물로 답하고 한글 연구에 더 매진한다.
세종의 대왕답고 성군다운 성품이 깃든 일화는 숱합니다. 그 중 또 하나, 충북 진천 인근의 성평(聖坪)은 원래 북평천이었습니다. 한글창제에 밤낮으로 애쓰다 지독한 안질에 걸린 세종이 청주에 있는 초정약수로 치료차 오가며 유숙한 곳입니다. 성군(聖君)이 여장을 풀고 시름을 던 곳이라 하여 주민들은 성평으로 고쳐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은덕을 베푼 결과겠지요.
서울 광화문 광장 중앙에 있는 세종대왕 상. |
9일은 제568주년 한글날입니다. 어느 해보다 행사준비로 분주해 보입니다. 한글학회가 앞장서고, 세종문화회관도, 세종대왕 내외분이 잠든 영릉이 있는 여주도 다양한 행사를 열겠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때맞춰 국립한글박물관이 개관한다는 사실입니다.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부지 내 연면적 1만1322㎡(약 3425평)에 지하1층·지상3층 규모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해 1만1000점의 존귀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고 합니다.
가을 나들이 철을 맞아 가족단위, 특히 어린이를 둔 가정이라면 체험교육장소로는 이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최고급 전용 박물관에다 한글날도 지난해부터 법정 공휴일로 재 지정됐으니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로선 더 없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훈민정음 언해본 영인 |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할 일은 결코 아닙니다. 외형의 변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질은 한글 훼손실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변을 잘 살펴보십시오. 청소년들의 웬만한 대화는 욕반 비속어 반도 모자라 외계인 화법으로 둔갑한지 오래입니다. 재작년에 기지가 쓴 칼럼, ‘5월에 쓰는 말죽거리 잔혹사’ 한 구절을 따서 옮겨 봅니다. 말죽거리는 기자가 사는 동네 가까운 양재 사거리 일대를 말합니다. 당시에는 학교폭력이 사회적 화두가 될 때였는데 청소년들의 방과 후 놀이문화와 그 장소의 결핍을 지적한 것으로 내용 일부는 이렇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달 사이 말죽거리 먹자골목에 떼 지어 몰려다니는 중고교생들이 부쩍 눈에 띈다. 교복에 교복 같은 것에 외계인 복장까지 혼재한다. 노랑머리, 빨강머리도 보인다. 더러는 담배를 꼬나물고 침을 퉤퉤 뱉고 욕설은 예사다. 9할이 ×발, ×나, ×××야 등 ×연발탄인데 신기하게도 다자 대화는 원활하다. “교실에서 물 먹다 엎질러 재수 없었다”거나 “어젯밤에 용돈 달래다 한 방 맞았다”거나 뭐 그런 얘기다.』
제8회 세종대왕과 초정약수 축제 개막식(2014년 6월 충북 청원). |
문제는 2년이 지난 지금 사정이 더 딱하다는 겁니다. 어느 샌가 ‘멘붕(멘털붕괴)’이라는 말은 안방극장에서 버젓이 통합니다. 물론 언어는 시대흐름에 따라 변모합니다. 신조어가 대표적입니다. 따라서 이런 현상을 시대 또는 세태 반영이라 백번 양보 한다 칩시다. 그러나 골초였던 한 유명 소설가가 금연비법으로 ‘x나게 버티라’는 뜻이라며 ‘존버정신’이라는 해괴망측한 언어를 공공연하게 쓰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돼야 할까요. 더구나 그는 ‘SNS 대통령’으로 통하는 힘 있는 작가입니다.
오늘 따라 기자의 일터가 있는 광화문 광장, 그 중앙에 폼 나게 앉아 세상만사를 품에 보듬는 세종대왕. 그러나 오늘 따라 성군의 눈에 눈물이 고인 듯하고 장탄식이 길게 느껴져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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