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스로 명맥을 이어가던 남북간 대화 통로에 다시 먹구름이 일고 있다. 북한이 16일 밤 전날 판문점에서 있었던 남북 군사회담 내용과 접촉 과정을 조선중앙통신이 ‘공개보도문’ 형식으로 발표했다. 북한은 2인자 위치의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 명의로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과 긴급 접촉을 제안했지만 거부당했고, 거듭된 회담 요구에 남측이 급을 낮춰 응했다는 게 이날 ‘폭로’의 요지다. 특히 15일 판문점 회담에서 서해북방한계선(NLL) 문제와 대북 전단 살포 등의 논의에 우리 정부가 성의없이 임해 결렬됐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번 판문점 접촉은 남북 양측이 공개하지 않기로 사전에 약속한 바 있다. 그런데 이를 어기고 아무런 통보도 없이 그 내용을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은 외교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당국이 즉각 반박하고 유감을 표명한 것은 당연한 조치다. 모든 국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남북간 대화와 접촉은 신뢰를 상실하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내용도 왜곡된 부분이 많다. 회담 대표의 ‘격’을 문제삼고 나선 것이 그 대표적 예다. 공개보도문은 우리측 대표인 류승제 국방부 정책실장을 ‘허수아비’라며 몰아세웠다. 김관진 실장이 회담에 나올 것을 요청했는데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북한은 황병서가 아닌 김영철 정찰총국장을 ‘특사’ 감투를 씌워 내보내겠다고 통보해 왔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는 상대를 내 보내는 건 나무랄 일이 못된다. 북한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지난해 당국자 대화때도 우리측 류길재 통일부 장관의 상대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아니라 국장급 인물을 내세워 결렬된 적이 있지 않은가.
북한이 장성급 군사회담 하룻만에 그 과정을 폭로한 의도는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 파문으로 남북 관계가 다시 경색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제2차 남북고위접촉은 예정대로 개최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힌 것은 평가할 만하다. 북한 역시 굳이 남북 접촉을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은 아닌 듯하다. 공개보도문에선 “일정에 오른 고위급 접촉의 전도가 위태롭게 됐다”고 주장하면서도 “차후 움직임을 각성있게 주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화에 대한 기대를 접기 보다는 ‘남조선 길들이기’를 통해 향후 고위급 접촉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밉든 곱든 서로 얼굴을 자주 봐야 애정의 싹이 자란다. 한 걸음 물러서는 의연함이 더욱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