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의 ‘의리’, 中의 ‘정의’ 신드롬
뿌리는 신의·신뢰의 바탕인 ‘關係’
사회 곳곳서 빈발하는 관계의 왜곡
同生同樂의 정신으로 바로잡아야
요즘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말 중 하나는 ‘의리’다. 한국의 의리 신드롬과 비슷하게 중국에서는 ‘정의’가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지난 여름 중국에서 50대 청소부 여성이 은행 강도를 대걸레로 제압한 사건이 크게 보도된 것은 이 같은 중국의 사회적 풍조를 방증한다.
그런데 의리와 정의의 사전적 의미로 보나, 양국의 사회문화적 속성으로 보나 두 신드롬에는 하나의 뿌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관계(關係)’라는 단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의 의리와 흔히 ‘콴시’라고 불리는 중국 문화는 결국 개인과 개인 또는 개인과 집단 간의 신의ㆍ신뢰ㆍ영원성을 기대하게 하는 문화적 토양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 중심적인 문화는 간혹 ‘양날의 칼’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군대를 예를 들 수 있다. 필자가 군 복무시절 애창했던 군가 ‘전우’는 “겨레의 늠름한 아들로 태어나/(중략) 한 가치 담배도 나눠 피우고/기쁜 일 고된 일 다 함께 겪는…”이라는 가사로 구성돼 있다. 어디 기쁜 일 고된 일 뿐이었겠는가. 당시 생사를 함께 하는 ‘전우 관계’에서 의리는 생명과 같았다.
반대의 경우도 꼽아볼 수 있다. 올해 10대 뉴스에 빠지지 않을 사건 가운데 하나가 ‘윤일병 사건’이라 짐작된다. 왜곡되고 비뚤어진 집단주의, 따돌림의 병폐가 여지없이 드러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가해자들이 한 사람을 희생시키며 휘두른 폭력과 인권유린, 그리고 그 사실을 서로간에 철저하게 함구했던 것은 전우애도 의리도 그 무엇도 아닌 ‘비겁함’일 뿐이었다. 비단 군대만이 아니다. 요즘 한국 사회 곳곳에서는 관계의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
이 같은 왜곡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사상가인 맹가(孟軻)가 양혜왕(梁惠王)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맹가에게 양혜왕이 “선생처럼 고명하신 분이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우리나라(위)를 찾아주셨으니 장차 이 나라에 이익이 있겠지요?”라며 인사의 말을 건넨다.
이에 대한 맹가의 화답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왕께서는 어찌 이익만 운운하십니까. 진정 중요한 것은 인의(仁義)일 따름입니다. 만일 한 나라의 왕이 어찌하면 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 아래 있는 대부는 어찌하면 자신의 집안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선비와 서민들은 어찌하면 내 한 몸 이롭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아래위가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려 한다면 나라는 위태로워지고 맙니다.”
맹가가 강조한 인의가 결국 우리 시대의 정의ㆍ인의ㆍ의리 등을 모두 함축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나와 타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동생동락(同生同樂)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배우 김보성 씨는 ‘으리’라는 제스쳐로 일약 대중적 신드롬을 일으켰다. 의리라는 말이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닐진대 우리에게 특별한 공감을 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그가 외치는 의리가 바로 지금 우리사회에 꼭 필요한 ‘더불어 살자’는 의미를 어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가슴이 따뜻해지는 신문 기사를 봤다. 영국인으로서 처음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돼 8월 말부터 격리치료를 받았던 29세 청년 간호사인 윌리엄 풀리의 이야기다. 완쾌 이후 풀리는 다시 에볼라가 창궐하고 있는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을 찾았다고 한다. “무고한 죽음을 막기 위해 떠난다”며 활짝 웃던 그의 얼굴이, 선장으로서 승객에 대한 동생동락의 의리를 진도 바다에 헌신짝처럼 벗어 던진 세월호 선장의 고개 떨군 모습과 오버랩돼 씁쓸했다.
흔히 ‘사’자로 끝나는 직업은 일 사(事)가 아닌 ‘선비 사(士)’자를 쓴다. 선비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학식이 있고 행동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다. 한 사람의 전문가로서, 또한 조직의 리더로서 ‘의리와 동생동락’이라는 화두를 곱씹어 보게 되는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