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큰 힘이 되는 말 한마디는 무엇일까. 조금 새삼스럽긴 하지만 말 한마디로 서로에게 힘을 주자는 운동이 시작됐다. 2014년 11월 한국코치대회에서 출범한 ‘격려 사회 만들기’ 운동이 그것이다. 사회 한쪽에서 진행돼 온 ‘감사 운동’이 스스로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라면 ‘격려 운동’은 상대에게 필요한 말 한마디를 먼저 건네는 운동이다. 감사는 나부터 하는 것이라면 격려는 내가 먼저 남을 위해 주는 것이다.
격려에 눈을 돌리게 되면 ‘밟고 올라가는 삶’에서 어깨 걸고 ‘함께 나아가는 삶’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오르는 삶은 올라갈수록 외로워지나, 함께 나아가는 삶은 앞으로 갈수록 풍성해진다. 함께 걷는 행진의 길이가 길어지니 서로에게 힘이 더 커지고, 자연스럽게 ‘힘겨루기’가 아닌 ‘힘 나누기’가 된다. 그래서 내가 먼저 주는 격려 운동은 곧 나를 위한 운동이기도 하다.
온 세대가 동시에 체험한 세월호의 아픔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문화적 구분이 될 것이다. 세월호 체험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타인의 아픔이 무엇인지 공감하게 했고 개개인의 아픔을 국가가 결코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대해 개인인 내가 먼저 공감하는데 서슴없어졌다. 그래서 2014년 한 해가 저물어 갈수록 서울시청에 걸린 ‘토닥토닥’이란 문구는 더 따뜻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참고 지내기보다는 욱하고 찔러보거나 내질러버린다. 소위 ‘욱질’이다.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일 투성이라 그럴 수 있다. 아니 참고 지내는 근육이 연약해진 탓이다. 참아 오다 터진 것이든 원래 성질머리가 나빠 사사건건 부딪치는 것이든, 속에 있는 것을 삭히기보다는 털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털지 않으면 병 나기 때문이다. 혼자 스스로 털지 못하니 타인에게 욱하고 성질을 내 버린다. 참아 병나는 것보다는 욱질이 낫다. 또 무기력하게 있기 보다는 욱하고 소리 내는 편이 낫다. 욱질이 곧 나의 힘이다. 적어도 소위 ‘갑질’보다는 무척 낫다.
어쩌면 무기력이 욱질을 만들어 내는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이 무기력함에 내몰리다 보니 그 밑에 흐르던 분노가 자기도 모르게 터져나와 버리는 게 그 것일지도 모른다. 무기력한 ‘을’들이 한동안 지속하던 수동공격을 넘어 한번 해 대는 것이 욱질이다. 여기서 문제는 을이 을에게 하는 짓이라는 점이다.
매년 거듭되는 물수능ㆍ불수능은 10대 후반의 젊음을 무기력으로 내모는 강물이다. 대학 입학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이미 눈치와 무기력에 빠지고 난 이후다. 이들에게 대학 생활이란 ‘성적순’이나 ‘힘의 서열’에 익숙해진 창백한 취업 대기자로 졸업하거나 잉여로 맴도는 것 뿐이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욱질이란 살아있다는 존재의 증명일 수 있다. 무기력 밑에 흐르는 분노가 몸 안에 쌓이는 것보다는 그래도 풀어 버리는 게 나은 일이다. 이것이 곧 욱질의 세대적 기반 중 하나다.
‘시련이 없다는 것은 축복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는 에드거 앨런 포의 말은 그래도 한가한 말이다. 시련이 곧 축복일 수 있으려면 시련 다음에 꼭 축복이 있거나 적어도 시련의 끝이 보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원전 불안에서 연금 불안까지, 지금의 저출산이 만들어 낼 초고령사회로 가는 미래를 바라보면 불안과 불행감을 털기는 더욱 어렵다. 이를 통과하려면 필요한 건 욱질이 아니라 함께 어깨걸고 나아가는 격려뿐이다.
욱질을 계속하는 쪽은 편할지 몰라도 당하는 이들은 골병이 든다. 당하는 이 역시 욱질을 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버티고 있는 삶을 위해서나 욱질에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큰 힘이 되는 말 한마디’다. 그것이 곧 격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