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지인들에게 “나 ‘미생’ 찍고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OO의 장그래”라거나, “모두가 ‘장그래 멘토’ 오 과장이라고 생각”할지라도 “현실은 저질 마초인 마 부장”이라는 직장인들의 조롱 섞인 댓글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바야흐로 ‘미생’ 신드롬이다.
케이블 채널 tvN 드라마 ‘미생’은 만화이면서도 현학적이고 서술이 많았던 동명 원작(윤태호 작가)을 캐릭터 중심으로 가져오며 쳇바퀴 도는 삶을 살던 직장인들의 매일을 밀착했다. 상사와 부하직원, 정규직과 비정규직, 공채와 경력사원, 남자와 여자 사원의 서로 다른 직장내 생활방식을 담아낸 그들의 삶에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들이 투사됐다. 캐릭터들의 감정이 영상으로 비칠 때는 공감과 위로의 힘이 커졌고, 직장생활의 크고 작은 부조리를 현실적으로 그리면서도 영업3팀의 이상적인 근무환경을 통해 판타지를 부여하자 대리만족도 일었다.
시청자 반응이 뜨겁다. 지난 22일 방송된 ‘미생’ 12화는 평균 6.3%, 최고 7.8%의 시청률(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가구 기준)을 기록하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고, 드라마의 열풍으로 원작의 판매 부수는 4배 이상 올랐다. 지난해 10월 총 9권으로 완간된 ‘미생’은 하루 2000세트 이상 팔려나가며 지난 11일 기준 150만부 판매 돌파를 달성했다.
프로 바둑기사를 꿈꾸다 종합상사의 계약직 사원이 된 주인공을 중심으로 바둑의 특성을 직장인의 삶에 빗대 풀어낸 덕에 ‘바둑 열풍’도 불고 있다. 장그래가 명문대 출신 정규직 동료들의 무시와 괄시를 이겨내며 자신의 성과를 내는 모습에 교육열 높은 한국의 엄마들은 바둑교실로 향했다.
‘을’의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으나, 2014년 ‘미생’의 돌풍에선 어디에서도 위로받을 곳이 없었던 2000만 직장인들의 분노와 고단함이 읽힌다. 스펙 순위 최하급의 장그래는 누구나의 초년병 시절을, 퇴근 후 소주 한 잔이 간절한 오 과장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대안이 없으면 버티라”는 대사처럼 ‘미생’에선 저마다 ‘밥벌이의 씁쓸함’을 견디는 사람들을 통해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운다. 그것은 곧 개인의 가치였다. “그래봤자 바둑”, 그걸로 세상이 달라질 리도 개인의 존재가 변화를 맞을 리도 없지만 “그래도 내 일, 내 바둑이니까” 묵묵히 버티는 하찮은 존재들에게 이 드라마는 일종의 헌사와 같다. ‘아직은 살지 못한’ 미천한 바둑알일지라도, 오 과장에 근접할 만큼 술맛을 알아버린 다음날 생각치도 못 했던 “‘미생’ 신드롬의 이면”이라는 칼럼을 써내야 한대도…“그게 내 일이니까”.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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