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아뿔싸, 그만 경기 전날 관리인들에 의해 묻어 둔 비밀장치가 발각되고 맙니다. 게다가 경기 당일 작동 배터리를 숨겨 잠입한 학생들마저도 체포됩니다. 결국 도발적이나 기발한 이들의 기획은 이렇게 무위로 끝났습니다.
고리원자력발전소 위치도 |
흥미로운 것은 이를 계기로 자신만의 기술을 뽐내는 깜짝쇼가 ‘핵(hack)’이라는 이름으로 교내에 들불처럼 유행했다는 점입니다. 연구실이 불야성을 이루더니 어느 날 한 연구동에 환호성이 터집니다. 인공지능을 연구해 오던 동아리가 마침내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성공한 겁니다.
이들은 내친김에 대학본부 기밀장소에 설치된 컴퓨터에 밤마다 몰래 접속해 각종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수정하며 실력을 연마합니다. 학생들은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해커(hacker)라 부르며 더러는 자부심도 느낍니다. 컴퓨터가 귀하던 1960년대 중반 전설 같은 얘기입니다.
이처럼 해킹은 원래 악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세상 도처에 컴퓨터가 깔리면서 선악의 도마에 오르내리더니 범죄로 분류된 겁니다. 남의 전산망에 무단침입, 각종 기밀을 한순간에 거덜 낸 대가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필요악이라는 주장도 만만찮습니다. 해킹으로 인해 보안 시스템이 등장하고 이것이 무너지면 더 강력한 것이 창출되는 순기능 때문입니다.
해커도 등급이 있나 봅니다. 실제로 정부나 기업 등 주요 기관을 대상으로 해킹에 성공한 해커들은 영웅대접을 받는다고 합니다. 출소 후에는 귀하신 몸으로 출세의 길을 걷는 경우가 대부분인 게 사실입니다. 예컨대 전설적인 해커 케빈 미트닉은 형기를 마치고 보안컨설팅 전문기업의 CEO가 됐고, 국내의 경우 1996년 KAIST 전산망을 유린한 해커는 훗날 대기업 화이트 해커로 변신했다가 벤처기업 사장이 됐습니다.
해커 이미지 |
인터넷 강국을 자처하는 북한이 국제사회에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김정은 암살을 다룬 영화 ‘인터뷰’ 제작사인 소니픽쳐스에 테러위협을 가해 상영을 막고 해킹까지 한 혐의입니다. 미국은 이런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 하겠다고 합니다.
소니픽쳐스가 문제의 영화를 상영하지 않겠다고 하자 비난여론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가세합니다. “독재가 미국을 검열했다”며 “소니의 영화상영 취소는 잘못된 결정”이라고 몰아세운 겁니다.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받은 오바마 대통령은 ‘비례적 대응’을 천명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미국의 강경 천명이 있은 직후 북한의 인터넷이 23일 한때 중단된데 이어 24일 새벽에도 불통됐다고 합니다.
북한의 위협으로 제거되는 소니픽쳐스의 영화 ‘인터뷰’ 포스터 |
때마침 우리도 원전(고리 1,2호기) 기밀문서를 해킹당해 혼란스럽습니다. 해커의 언어 중에 북한식 언어가 살짝 보이면서 북한 소행일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습니다. 이번 해킹의 주인공을 자처하는 인물(john_kdfifj10290)이 지난 21일 새벽 자신의 트위터에 남긴 글에는 북한식 표현이 분명히 보입니다. 글 첫 머리의 “청와대 아직도 아닌 보살”이 그 것입니다. ‘아닌 보살’은 ‘시치미를 뚝 떼다’는 뜻의 북한 언어로 우리에겐 무척 낯설기만 합니다. 또 이 글에는 “근데 바이러스는 다 잡앗는가요?”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또한 평양사투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아무튼 성탄절부터 원전가동을 중단하라며 열흘사이 5번째 기밀문서를 공개한 해커지만 한수원은 번번이 제대로 된 기밀문서가 아니라는 식입니다. 사태가 심각한 데도 한수원은 “폭탄을 제거할 능력이 없다”며 무기력으로 일관합니다.
김정은의 암살을 다룬 영화 ‘인터뷰’의 한 장면 |
바야흐로 총성 없는 사이버 전쟁시대입니다. 사이버 공격으로 안보마저 위태로워지는 상황입니다. 물론 수사기관이 해커를 쫓고 있으나 너무 안이해 보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안의 중요성을 언급하긴 했지만 이런 때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총괄적으로 나서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해커는 오리무중이고 국민 불안은 첩첩산중입니다.
/hchwa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