밋밋한 구랍의 어느날 세계를 아연케 한 사건은 단연 ‘땅콩회항’이다. 사건의 전모가 알려지면서 세계 5위권의 항공사는 국제적인 조롱거리로 전락했고, 안팎의 신뢰도도 급전직하했다.
이 사건은 한국의 자본주의 수준을 대내외에 노출시킴으로서 국가적 위신도 함께 끌어내렸다. 민주적인 절차와 제도가 작동하지 않는 일부 한국 기업들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건을 추상화하면, 봉건적 주종관계와 통제수단이 없는 자의적 권력의 실상, 이것이다. 이른바 ‘갑질’로 압축되는 전근대성. 수백년 간의 학습도 소용없이 계몽상태 이전으로 일순간 돌려버릴 수 있도록 작동하는 그런 기제, 허약한 민주주의.
이는 최근 조심스럽게 논의에 불을 붙인 기업인 사면과도 관련이 깊다. 사회지도층의 탈법에 대한 사회적 여론은 더 따가워질 수도 있다. 계량할 수도 없는 경제적 효과 외에 무엇으로 사면의 정당성을 설명할 것인가.
인간 활동에 경제 아닌 게 어디 있으랴만 지나친 경제화는 인간화를 배제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인간이 소외된 경제란 괴물이나 다름없는 작용을 한다. 의식주상 최상위의 풍요를 누린다고 해서 모두 노블레스는 아닌 것이다.
이번에 땅콩이 그런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내주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민주적 절차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매번 그렇듯이 사건들은 그 떠들썩한 처리과정 자체가 본질을 대체하는 한계를 갖고 있는 탓이다. 즉, 별다른 성찰적 반작용 없이 제의성에 묻혀 잊혀지기 쉽다는 뜻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갑은 을이란 기반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만 인식해도 달라질 수 있다. 상생이란 개념만 익혀도 되는 것이다. 큰 변화는 이런 작은 배려에서 시작된다.
을미년이 수상하다고들 한다. 당장 러시아가 채무불이행 위기에 빠졌고 조금 살림살이가 나아진 미국은 금리인상을 만지작거린다니 말이다. 우리의 젖줄이나 다름없는 중국의 성장도 둔화되고 있다. 대외적인 악재에 첩첩 포위된 형국이다. 이럴수록 ‘사회적 상생’이 필요하다. 그간 진행돼온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상생을 더욱 심화하고 사회적으로 확대해볼만 하다. 긴장과 갈등을 미루고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는데 일시나마 힘을 합쳐보는 게 어떨까.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노사는 노사대로, 시민사회는 또 그들 방식으로 좁은 자기 진영에서 나와 일시나마 상생에 합의할 순 없을까. 밥그릇 싸움에서 우리는 언제나 불퇴전이다. 우리끼리 갈등에는 사생결단 하듯 덤벼드는 이상한 민족이 되고 말았다.
이런 불퇴전의 각오는 밖으로 향해야 한다. 근로자의 세심한 손끝 하나가 기술력이요 경쟁력이다. 공무원의 공정하고 효율적인 일처리 역시 국가의 힘을 끌어올려 대외 경쟁력을 높이게 한다.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사고와 행동이 요구된다. 전환기는 내부에서 만들어질 땐 추동력이 된다. 하지만 외부로부터 그것이 강요되는 경우에는 기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freiheit@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