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홍길용 기자]‘나를 낮춰 상대를 교만하게 만든다(卑而驕之)’.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孫武)가 이끄는 오(吳)나라 군대가 당시 초강대국이던 초(楚)나라를 꺾은 비결이다. 하지만 교만한자는 반드시 패한다(驕兵必敗)는 사례는 그 이전에도 충분히 많았고, 그 이후에도 수없이 반복된다. 가장 치명적이지만, 또 가장 흔한 실패의 원인인 셈이다.
깔보는 마음은 상대를 업신여긴다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자신을 실제보다 높이는 경우도 포함된다. 제대로 상황파악 하지 못하는 태도 역시 깔보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관계자들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경제영토 확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영토란 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이다. FTA로 미국, 유럽연합(EU), 중국의 경제통제권을 우리가 갖게 된 걸까? 상대국에서 알면 기가 찰 일이다. 이 논리면 우리나라가 미국, 유럽, 중국의 경제영토에 편입된 것이다.
국가간 협정은 상호적이다. FTA로 무역장벽이 철폐되면 우리 물건의 수출만 잘 될까? 그러면 상대는 뻔히 손해인 줄 알면서 FTA를 체결한 게 된다. 당장 FTA로 비교열위인 국내 산업들은 치명적 타격을 입을 것이란 우려가 크다. 자동차와 전자 등 우리 기업들을 안방시장에서 견제하려는 글로벌 경쟁사들의 공세도 거세다.
FTA의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각종 제도적 차별 철폐다. 제도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은 국력이다. 우리가 미국이나 중국의 제도변화를 이끌어낼 확률과, 미국이나 중국이 우리의 제도변화를 이끌어 낼 확률을 비교해보자. 미국이나 중국 등이 FTA를 앞세워 자국에 유리한 제도변화를 압박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당장 달러나 위안화, 유로화가 재채기만 해도 감기에 걸리는 게 수출중심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의 현실이다.
정치인들에게 임기 중 치적이 중요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FTA처럼 상대방이 있는 사안까지 전리품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우리가 개별 국가와 FTA 체결에 자족할 때 경제대국들은 다자간 무역협정에 공을 들였다. 우리가 세계 경제영토의 무려 70%를 가졌다면, 왜 다자간 무역협정 무대에서는 변두리에서 오락가락일까?
지난 주 삼성, 현대차, LG 등 재계 총수들이 신라호텔에 묵고 있는 중국 국무원 왕양(汪洋) 경제부총리를 찾았다. 국가 정상도, 정부 수반도 아닌 정부 한 부처의 책임자에게 총수들이 달려간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중국 고위인사들의 단골인 신라호텔에서 옛 조선에서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태평관(太平館)’을 떠올릴 정도다. 스스로를 높이는 정치인들과 스스로를 낮추는 기업인들, 과연 누가 세상을 제대로 읽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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