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정산 파문에 이어 복지와 증세 논란이 뜨겁게 일었던 얼마 전 기획재정부의 한 고위관계자가 털어놓은 말이다. 정치권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국민을 속이는 일”이라느니 “법인세도 성역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정부를 몰아세웠던 때였다.
이 말에는 여러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정치권이 금방 증세에 나설 것처럼 주장하지만 그것은 여론을 고려한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며, 정치권이 향후 보일 행동은 다를 것이라는, 일종의 냉소가 섞인 발언이었다. 정치권이 목소리를 높여도 정책, 특히 증세나 구조개혁과 같이 사회적 갈등이 수반되는 정책은 정부만이 추진할 수 있다는 관료로서의 자부심도 담겨 있었다.
최근 여권이 진용을 새롭게 갖추고 청와대와 정부, 새누리당이 정책조정협의회를 출범시켜 당을 중심으로 정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정책 입안에서부터 입법까지 당이 중심이 돼 경제활성화와 구조개혁의 속도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당이 국민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국민 여론에 귀를 기울이면서 정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정 컨트롤타워를 새로 구축한 것은 여권의 다양한 계산이 조합된 결과다. 청와대는 이를 통해 여권 내부의 분란을 봉합하고, 당은 집권당으로서의 이미지와 위상을 높이게 됐다. 하지만 정작 현안을 책임있게 밀고나가는 실체는 잘 보이지 않는다.
기재부는 최 부총리가 최근 강연에서 복지지출의 빠른 증가로 재정건전성이 우려된다고 한 발언이 증세 불가피성을 시인한 것처럼 해석되자 부랴부랴 대응에 나섰다. 최 부총리의 발언에 대해 “복지수준에 대한 사회적인 컨센서스가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복지수준과 세금부담, 재정수지 사이에 최적의 조합을 찾을 필요가 있음을 설명한 것“이라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문제는 정부가 이러한 말의 성찬 뒤로 몸을 숨기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에서 보는 ‘최적의 조합’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모두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논란을 피하려는 것이다. 정치권이 국민적 컨센서스를 도출해야 한다는 공허한 말만 반복하고 있다.
정부는 방대한 데이터와 정책의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는 정책의 산실이다. 정부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다. 관료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논란이 예상되는 사안에 대해선 대안을 내놓고 대국민 설득에 나서는 등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 그게 정부의 존재이유다. 정부도 인정하는 ‘골든타임’에 책임이 실리지 않은 국민적 컨센서스라는 말에 몸을 숨기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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