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불거지자 지난 12일 청와대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법과 원칙에 따라 성역 없이 엄정히 대처하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내놨다. 역대 대통령들이 권력형 비리가 터질 때마다 던지는 상투적 표현과 다름 없었다. 그러나 리스트에 등장한 이완구 총리가 ‘비타 500 박스’에 담긴 3000만원의 선거자금을 받았다는 정황 증거가 드러나는 등 국민적 의혹이 증폭되지 사흘만에 직접 입을 뗐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1주기 현안점검회의에서 “부정부패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무일 검찰 특별수사팀이 ‘살아있는 권력’ 이라도 주저하지 말고 끝까지 비리를 파헤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발언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국민의 의구심은 검찰이 과연 정권 실세들의 불법 정치자금과 대선자금 문제를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지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기회에 우리 정치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정치개혁 차원에서 완전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수사 범주에 과거 정권의 불법이나 비리도 포함해야 한다는 지침으로 들린다.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이를 ‘위기정국 돌파용 물타기’로 악용한다면 역풍을 맞을 것이다. 부패척결과 함께 정치개혁을 화두로 삼은 점은 바람직하다. 2002년 ‘차떼기 파동’ 이후에도 근절되지 않고 있는 적폐를 걷어내는 계기로 삼아야 나라가 온통 성완종 홍역을 치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월호 사태나 청와대 문건 유출 파동 때 보였던 박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이 이번에도 그대로 재연돼 걱정스럽다. 파문을 불러온 당사자들은 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다. 이들은 성완종으로부터 받은 돈을 박 대통령이 출마했던 대선후보 경선 및 대선자금으로 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자신의 주변 인물들이 대거 불미스러운 일에 이름이 거론된 것에 대해 먼저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어야 했다. 남의 일 처럼 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얘기다. 문건 유출 파동때 ‘찌라시에 놀아나는 민심’을 타박했던 것처럼 이번 파문을 ‘불법 로비에 실패한 비리 기업인의 일방적 폭로’로 치부해 버린다면 더욱 큰일이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사태 초기에 국민 여론과 유가족과의 소통에 실패해 정국이 경색되는 빌미를 줬다. 성완종 파문이 또다시 국정현안을 모두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돼서는 안된다. 그러려면 대통령부터 민심의 향방을 제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