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최태원 회장 등 작심 비판
경총 ‘제3의길’ 이례적 토론회
“요즘 경제는 버려진 자식”, “경영 20년, 이런 지정학적 위기는 처음”, “경제가 이념에 발목잡힌 상황 지속”….
숨죽이던 재계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옥죄는 규제법안과 반기업 정서 속에 ‘은둔자’를 자처했던 재계가 정치권을 향해 강도 높은 쓴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관련기사 3면
퍼펙트 스톰(두가지 이상 악재가 동시다발로 발생한 초대형 위기) 위기로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하지만 2개월째 계속되는 ‘조국 블랙홀’로 마비된 정치권에 참다 못해 터져나오는 분노이자 절규다.
선봉은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다. 박 회장은 지난달 25일 전국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에서 “이제 경제는 버려지고 잊혀진 자식 같다”며 작심 비판을 했다. 같은 달 18일에는 “정치권이 경제 이슈에 대해 제대로 논의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난다”며 돌직구를 던졌고, 3일에는 “이제 제발 정치가 경제 좀 놓아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박 회장은 20대 국회에만 12차례 방문해 신사업 육성과 조세제도 개선 등 경제활성화를 위한 조속 입법과제를 건의해왔다. 그러나 “정치 상황 탓에 경제 법안 논의를 못해 답답한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경영 20년만에 이런 지정학적 위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최 회장은 지난달 19일 미국에서 특파원들을 만나 “이같은 지정학적 리스크는 앞으로 30년 이어질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 역시 같은달 24일 취임 후 처음 열린 사장단 워크숍에서 지금의 경제상황을 ‘L자형 경기침체’라고 진단하며 저성장이 상시화된 상황에 대한 생존법을 주문했다. 반도체 부진과 일본 수출규제, 사법리스크까지 겹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6월부터 비상경영에 돌입한 상태다.
경제단체도 목소리를 높였다.
‘최순실 사태’에 연루되며 정부의 소통창구에서 ‘패싱’됐던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달 25일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원내수석부대표를 비롯한 정책라인 인사들이 방문한 자리에서 법인세 부담 완화, 상속세 완화, 경영권 보호 장치 도입 등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10대 정책 과제를 전달했다.
이날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3년 만에 전경련을 방문해 화제가 됐다. 이날 간담회에는 전경련을 탈퇴한 삼성 현대차 SK LG 등 4대 그룹을 비롯해 14개 그룹 고위 경영진이 참석해 여당 의원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지난 1일 ‘국가경쟁력 강화, 보수와 진보를 넘어선 제 3의 길은’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그동안 노사문제에 특화돼 왔던 경총이 정치 이슈를 토대로 토론회를 연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손경식 경총 회장은 “최근 우리 경제의 어려움이 커져가는 가운데 ‘경제가 이념에 발목 잡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며 “국가경쟁력 강화에 전력하지 않으면 20년간 장기불황에 빠진 일본의 전철을 답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제는 국민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해 ‘기업의 기(氣)’를 살려 투자를 활성화하도록 전면적인 국면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업 안팎에서는 극심한 정쟁 속에 기존 산업경쟁력은 떨어지고 신산업은 규제장벽에 막혀 성장하지 못하는 현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수출은 줄고 고용상황 등 국민경제가 안좋은데 정부는 ‘경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마이웨이식”이라며 “정부·여당의 경제상황 인식이 현장과 괴리가 너무 크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경묵 서울대 교수(경영학)는 “우리 경제는 장기적으로 성장동력이 될만한 게 없어 하향 길만 남아있다”며 “기업과 기업가들이 경제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하는데 계속해서 규제만 만들어내는 국회라면 차라리 공전하는 게 국가 경제에 나을 수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진영 논리가 모든 이슈를 빨아 들였다”며 “나라 경제를 걱정하는 정치인이 안보인다. 어떤 시련이 닥쳐야 경제를 한 번 쯤 봐줄지 모르겠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천예선 기자/cheo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