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홍성원 기자] 그야말로 백계무책(百計無策)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가 몰고 온 죽음의 공포가 미국 교육 현장을 논란의 한복판에 소환했다. 가을에 개학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국론 분열 수위까지 왔다. 국가의 미래인 아이의 생명이 달린 문제여서 쉽사리 결론 낼 순 없다. 한국도 교육부의 개학 방침에 “죽어도 못 보낸다”던 부모가 적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인지상정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은 명확하다. 재선 성공을 위해선 학교 문을 열어야만 한다. 그래야 돌봄이 필요한 아이를 맡기고 부모는 생업에 온전히 복귀할 수 있다. 경제를 빨리 정상궤도에 올리려면 학부모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을에 개학하지 않으면 연방정부 지원을 끊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의 핵심 참모 중 하나로 강경 보수파인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그냥 학교에 가면 된다”고 했다. 로버트 레드필드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장은 “공중보건 책임자이자 할아버지로서 코로나19 때문에 학교 문을 닫는 건 개학하는 것보다 아이에게 더 큰 보건 위협이 된다고 믿는다”며 “지방정부와 협력해 안전하게 개학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행정부 주요 인사가 국민을 어르고 달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형국이다. 이들의 말은 그러나 현장에 먹히지 않고 있다. 당장 아이를 가르쳐야 할 교사부터 복귀를 두려워하고 있다. 삶과 생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워킹맘 등 학부모의 가슴도 까맣게 타들어 간다.
학교 문을 여는 걸 두고 지역별로 천차만별의 결정이 내려지고 있다. 캘리포니아주만 해도 로스앤젤레스(LA)와 샌디에이고는 전면 원격수업으로 가을학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아이 안전을 위해 학교를 열지 않겠다는 것이다. 같은 주에 속한 오렌지카운티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려고 한다. 지난 13일 교육위원회가 학교 정상화 권고안을 찬성 4· 반대 1로 통과시켰다. 단순히 개학하는 걸 넘어 마스크를 착용하거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권고를 담았다. 교육위는 아이가 코로나19에 걸릴 위험이 크지 않기 때문에 교실에서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건 과학에 근거하지 않으며 해로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오렌지카운티 거주 학부모는 이 결정이 적절한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중이다.
미국이 학교와 관련한 결정은 지역 및 주 단위로 이뤄져야 한다고 보고, 자율권을 지방 정부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 대부분의 교육예산은 주와 시, 카운티 등에서 관할하고 있다.
주요 대도시는 가을학기를 온라인으로 진행하겠다는 방침을 속속 내놓고 있다. 뉴욕시는 대면과 온라인수업을 병행하기로 했다. 워싱턴DC에선 일부 학교가 온라인 개강을 검토하고, 나머지 지역은 주 2~3일은 등교하되 나머지는 재택수업을 하는 안을 저울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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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안이 난제인 건 당장 아이를 지도할 교사도 복귀를 꺼리고 있어서다. 최근 USA투데이와 여론조사업체 입소스가 설문을 돌린 결과, 교사 5명 가운데 1명꼴로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개학해도 교사가 충분치 않을 수 있다는 걸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국립교육통계센터(NCES)에 따르면 2018년 현재 미국 초·중등교사는 350만여명이다. 이 가운데 75%가 여성이다. 이들은 학교 복귀와 관련해 요즘 압박을 많이 받고 있는데, 가족을 희생하면서까지 수업을 할 순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파악된다. LA 지역 교사노조가 완전한 원격수업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교사가 괜한 걱정을 한다고 탓할 수도 없다. 미 국민 전체가 코로나19의 공포에 떨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 인터넷매체 악시오스와 입소스가 219명의 학부모를 대상(7월 10~13일·표본오차 ±7%)으로 ‘가을학기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게 얼마나 위험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71%가 ‘많이 혹은 중간 정도로 위험하다’고 답했다. 흑인은 이 비율이 89%, 히스패닉계는 80%, 백인은 64%로 집계됐다.
취학 연령이 되지 않은 유아를 위한 어린이집은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미국진보센터 자료에 따르면 연방정부의 지원이 없으면 아예 사라질 위기에 처한 아이돌봄시설이 447만3501개다. 전체의 49%에 달한다. 코로나19로 문을 닫아 매출이 없는 상황이 수개월째 이어져 망하기 일보 직전이다. 전문가는 꽤 많은 어린이집이 다신 문을 열 수 없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이미 악화한 아이돌봄 시스템이 더 나빠질 거란 얘기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한 공립학교 소속 스쿨버스가 주차돼 있는 모습. [EPA] |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양육까지 해야 하는 부모는 시쳇말로 ‘죽을 맛’이다. 대표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4100만명이 넘는 미국 근로자(18~64세)가 18세 이하의 자녀를 최소 1명 기르고 있다. 이 중 3350만여명은 14세 이하 아이를 최소 1명 양육한다. 6세 이하 아이를 기르는 근로자는 1630만명에 달한다.
중요한 건 일하는 부모 중 14세 이하 아이를 직접 돌볼 수 없는 사람의 수가 어느 정도냐다. 전체의 70%에 해당하는 2350만명이나 된다. 서울 인구(2020년 6월 현재 972만846명)의 배가 넘는 미국 부모가 아이를 돌볼 수 없어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의존하는 셈이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아이돌봄 프로그램과 학교에 기대야 하는, 일하는 부모가 미국 전체 노동력에서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V자’이든 ‘나이키 커브’이든 어떤 형태의 경제회복도 이들이 지속적으로 노동시장에 참여하거나 재진입이 가능해야 하는데 완전히 발목이 잡혀 있는 형국이다. 금융·보험·교육 등의 산업은 이제까지 재택근무가 가능해 접객업이나 소매업 대비 가계를 안정적으로 끌고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직종에 몸담은 부모도 앞으로 지속 가능하게 재택근무를 할 수 없게 되고, 새 학년도에 자녀를 돌봐줄 수 없을 수도 있다. 경제의 앞날이 코로나19에 저당 잡혀 있기 때문이다.
학교 등을 지속적으로 폐쇄하면 근로빈곤층(워킹푸어)과 엄마에게 특히 큰 타격이 될 거란 예상이다. 학교에 의존하는 일하는 부모 5명 가운데 1명꼴로 연방 빈곤기준선의 200% 이하(3인 가구 기준, 연간 4만3440달러)의 생활을 한다고 브루킹스연구소는 전했다. 이 비율은 특히 선벨트(남부 15개주를 아우르는 지역)에 걸쳐 있는 도시에서 배 이상 높다고 한다. 가족 중에 일자리를 잃고 아이를 돌보게 되면 재정적 어려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부모 중 한 명이 일을 그만두고 집에 머물면서 아이를 돌보겠다고 결정하면 통상 엄마가 경력을 단절할 가능성이 크다. 14세 이하 아이를 키우는 여성과 남성의 비율은 각각 45%, 55%인데, 이들이 학교에 의존해야 일할 수 있는 비율은 55%, 45%로 집계된다. 여성이 육아를 위해 직장을 더 많이 그만둔다는 것이다.
진보 성향인 브루킹스연구소는 개학을 해야 한다는 쪽이다. 위험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으니 최대한 창의적인 방법으로 수업을 재개하고, 경제회복도 가능케 하자는 논리다. 연방정부의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이 맥락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개학을 안 하면 지원을 끊겠다’고 한 건 ‘난센스’다. 비난이 비등하자 곧바로 등교를 재개하는 학교에 재정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한 것만 봐도 신중하지 않은 언사였다.
앞서 미 행정부와 의회는 2조달러(약 2400조원)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담은 법(CARES Act)을 통해 300억달러 이상을 주에 지급하고 교육예산상 시급한 문제에 대응토록 했다. 아이돌봄 등엔 35억달러를 배정했다. 돈이 더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지난 5월 교육단체는 원격수업과 영양 지원 프로그램을 위해 2500억달러를 추가로 의회에 요청했다.
또 한 번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쓰는 걸 꺼리던 공화당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1조달러 규모의 추가 부양책의 세부 사항을 다음주부터 공개할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3조달러엔 턱없이 모자라지만 개학 지원을 위한 자금이 핵심이 될 거라는 관측이다.
마크 메도 백악관 비서실장은 지난 15일 기자들에게 현재 가장 초점을 두는 3가지 사안으로 ▷학교 개학 ▷코로나19 치료법 ▷백신을 꼽았다. 미국 전체가 학교 운영에 관한 결론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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