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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테크 영재’ 美 시골 소년 오마하 넘어 ‘세계 구루’로
11세에 투자 시작한 워런 버핏
26세에 지인들과 투자조합 설립
주주·책임경영 중시한 가치투자
재산 99% 기부선언 꾸준히 실천
세계적 부호 된 이후에도 검소한 생활
시골 옛집서 66년째 살며 중고차 몰아
빌 게이츠와 ‘더기빙플레지’ 기부 운동
현재까지 기부금액만 600억 달러 달해
버크셔 주가로도 인정받은 버핏의 혜안
시총 1조弗 돌파, 빅테크 제외 첫 美기업

“35세가 될 때까지 백만장자가 되지 못하면 오마하의 가장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리겠다.”

13세 소년 워런 버핏(Warren Edward Buffett)은 또래 아이와는 조금 달랐다. 친구와 노는 데 빠져 있을 나이였지만 그는 웬만한 어른보다 셈에 밝았고,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들여다 보기를 좋아했다.

‘백만장자’는 어린 버핏에게 ‘커서 부자가 될 거야’, ‘대통령이 될 거야’ 같은 막연한 꿈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계획이었다. 몇 년 뒤 목표 시점을 35세에서 30세로 당긴 그는 실제로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백만장자라는 목표를 이뤄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94번째 생일을 맞은 버핏은 이제 백만장자를 넘어 억만장자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대부호가 됐다.

돈에 대한 관심과 꾸준한 노력은 하마터면 자신이 뛰어내릴 뻔한 오마하의 가장 높은 빌딩보다 더 많은 자산을 일구고, 더 높은 위치에서 세계 경제를 꿰뚫어보도록 이끌었다.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해서웨이의 시가총액은 그의 생일을 이틀 앞두고 장중 1조달러(약 1339조원)를 돌파하며 미국 기업 중 빅테크(거대 기술 기업)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시총 ‘1조달러 클럽’에 진입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오마하의 소년은 이제 전 세계 투자자에게 가르침을 주고, 부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고 있다.

어린 시절의 워런 버핏 [두오모이니셔티브(duomoinitiative.com]

떡잎부터 다른 아이...여섯 살에 껌 팔고 열 한 살에 투자

버핏은 1930년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하워드 호만 버핏과 레일라 버핏의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주식중개회사를 운영한 아버지와 수학을 잘 했던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아서인지 버핏은 어릴 때부터 숫자에 강하고 경제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는 버핏이 여섯 살 때 주식 통장을 선물해 돈에 눈을 뜨게 했고, 같은 해 버핏은 할아버지의 슈퍼마켓에서 껌을 산 후 이웃에게 팔아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장사에는 흥미를 느껴 이후 코카콜라, 중고 골프공, 팝콘 등 다양한 상품을 팔아 수익을 남겼다.

버핏 전기 ‘스노볼’에 따르면 그는 열 살 때 ‘1000달러를 버는 천 가지 방법’이란 책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특히 체중계의 사례에 공감했다. 자기에게 체중계가 있다면 하루에 쉰 번씩 몸무게를 잴 것 같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체중계를 사는 데 기꺼이 돈을 쓸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체중계를 하나 사서 팔아 이문을 남기면 이 이문으로 체중계를 더 사들인다. 머지않아 체중계 20개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은 계속 하루에 몇 번씩 자기 체중을 잴 거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기가 바로 돈이 있는 곳이구나.’ 복리, 그보다 더 좋은 건 있을 수 없었다”고 버핏은 회고했다.

복리의 마법을 깨달은 그는 열 한 살 때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생애 첫 주식으로 아버지가 고객에게 팔던 시티즈서비스 6주를 샀는데, 38달러에 사서 40달러에 팔았다. 하지만 이후 주가가 200달러까지 오르는 것을 보고 장기 투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15세 때는 신문 배달로 한 달에 175달러(약 23만원)를 벌어 자신을 가르치던 고등학교 교사보다 많은 수입을 올렸으며 모은 돈으로 오마하 북부의 농지를 매입했다. 17세 때는 핀볼 게임기 대여 사업을 했다. 다양한 사업과 투자를 통해 버핏은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 5000달러(약 670만원)의 재산을 모았다.

이미 경제 원리를 알았던 버핏은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강요로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 입학해 2년간 다니다가 네브래스카대로 편입해 학사를 취득한다.

이후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았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을 만나게 된다.

대학원 졸업 후 오마하로 돌아가 아버지 회사에서 주식중개인으로 일하고, 오마하대에서 투자 원칙을 가르치던 버핏은 1954년 드디어 그레이엄의 투자회사 그레이엄-뉴먼에서 일하게 된다. 그레이엄의 투자 원칙은 기업의 운전 자본보다 3분의 1이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주식을 찾는 것이었다.

훗날 버핏은 “내 투자 중 85%는 그레이엄에게, 15%는 필립 피셔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망해 가던 직물 공장을 세계적 투자회사로

그레이엄-뉴먼에 입사한지 2년째인 1956년, 은퇴를 결심한 그레이엄은 버핏에게 동업자가 돼 회사를 맡아 줄 것을 제안했다. 26세 밖에 되지 않은 까마득한 제자에게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버핏은 이를 거절했다. 애초에 그레이엄 밑에서 일하고 싶어서 입사했기 때문에 그레이엄이 은퇴한다면 그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고, 자기보다 높은 지위의 다른 동업자 미키 뉴먼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오마하로 다시 돌아온 그는 26세에 가족, 친구와 투자조합 ‘버핏어소시에이츠’를 설립했다. 그레이엄-뉴먼의 자매 헤지펀드 회사인 뉴먼앤드그레이엄을 모델로 만든, 동업자 7명으로 구성된 회사였다.

다른 사람의 돈을 맡아서 관리한다는 것은 버핏에게 무한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했다. 수익이 나면 수수료를 받았지만 수익이 없으면 손해를 봤고, 마이너스가 되면 그 손실을 갚아야 했다. 자신에게 돈을 맡긴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강박적인 생각은 이익을 내도록 이끌었다.

오마하에서 유명세를 탄 버핏은 1959년에 평생을 함께 할 사업 파트너 찰리 멍거를 만난다. 그리고 30세에는 자신과의 약속대로 이미 백만장자가 돼 있었다.

5년간 버핏의 투자조합은 251%의 누적수익률을 기록해 다우지수(74%)보다 훨씬 높은 성과를 올렸다. 1962년 버핏의 투자조합은 11개에 달했고, 7명이던 투자자는 100명이 넘었다. 10만5100달러(약 1억4000만원)로 시작한 투자조합의 순자산은 720만달러(약 96억원)로 불어났다.

불과 6년 만에 그레이엄-뉴먼보다 더 큰 투자회사를 일군 버핏은 11개 조합을 ‘버핏파트너십’으로 통합했다.

버핏은 직물 공장 버크셔해서웨이의 주식을 사모으다가 회사가 망해가자 아예 인수했다. 그는 당시의 버크셔해서웨이가 “담배꽁초” 수준이었다고 평가했지만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투자회사로 변신시켰다.

1973년 주식시장이 대폭락하자 버핏은 주식을 쓸어 담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배달하던 신문 워싱턴포스트의 주식을 매입해 가장 큰 사외 투자자가 되기도 했다.

그는 투자은행 살로몬브라더스에도 거액을 투자했는데, 후에 불법 채권 거래 사건으로 은행이 위기에 처하자 임시로 경영을 맡아 회생을 도왔다. 투자자는 물론 자신이 투자하는 기업에까지 책임감을 갖고 임하는 자세는 버핏을 단순한 투자자가 아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평판과 주주를 중시하는 원칙주의자

버핏은 수익을 추구하면서도 사람을 중심에 뒀다. 주주를 자신과 함께 하는 파트너로 여기고, 원칙을 지킴으로써 신망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는 버크셔해서웨이 주주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위험 관리는 최고경영자(CEO)의 몫이며 회사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다. 또 미국의 대형 금융기관 몇 곳을 망쳐 놓은 사람들은 주주가 아니었는데 그 책임은 주주가 졌고, 파산한 금융기관의 CEO와 이사들은 대체로 멀쩡했는데 이런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버크셔해서웨이 경영진에게 보내는 서한에서는 회사의 평판을 계속해서 열심히 지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며 “우리가 돈을 잃을 수는 있다. 심지어 많은 돈을 잃어도 된다. 그러나 평판을 잃을 수는 없다. 단 한 치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수십 년 동안 반복해서 강조했다. 합법성의 수준을 넘어 “똑똑하지만 비우호적인 기자가 쓴 기사가 중앙 일간지 1면에 실려도 당당할 정도”의 도덕적인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주주를 대표하는 이사들과 회사를 이끄는 경영자가 투철한 주인 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기업 문화를 조성하도록 힘썼다. 여느 상장 대기업과 달리 이사에게 임원배상책임보험을 제공하지 않고, 이들이 잘못해서 주주에게 손해를 끼치면 자신도 손해를 보게 되는 구조가 일례다.

주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버핏의 철학은 “버크셔해서웨이의 형식은 주식회사지만 우리의 마음 자세는 동업자다”로 시작하는 주주 원칙에 드러난다. 그는 버크셔해서웨이가 보수적이지만 해마다 수익률을 높여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투자를 할 때는 “시간은 훌륭한 기업에는 친구이고 평범한 회사에는 적”이라는 생각 아래 “좋은 회사를 엄청난 가격에 사는 것보다 엄청난 회사를 좋은 가격에 사는 게 훨씬 더 낫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1969년 기사에서 “1957년 버핏파트너십에 투자한 1만달러는 지금 26만달러가 됐다. 이제 1억달러 규모로 성장한 이 투자회사는 그동안 연평균 31%의 복리 수익률을 기록했다. 지난 12년 동안 단 한 번도 돈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며 “버핏은 일관되게 근본적인 투자 원칙들을 따름으로써 이런 성과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그의 원칙주의자 면모에 대해 포브스는 “버핏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취향들은 단순하다”고 평했다.

버핏이 오늘날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며 전 세계 투자자에게 가치투자의 대가로 자리하게 된 것은 그가 인내심을 갖고 원칙을 지킨 하루하루가 쌓인 결과다.

검소한 억만장자…‘너드미’ 사랑꾼

버핏은 세계적인 부호가 된 이후에도 검소한 생활을 지속했다.

포브스에 따르면 버핏은 현재 순자산이 1404억달러(약 188조원)로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서 6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번화한 도시의 대저택이 아닌 시골 마을 오마하의 옛 집에서 66년째 살고 있다. 1958년 3만1500달러(약 4200만원)에 구입한 오마하 집은 지난해 기준 가격도 약 120만달러(약 16억원)로 미국 중산층의 일반적인 주택 수준으로 알려졌다.

자동차도 억대의 슈퍼카가 아닌 2014년 4만5000달러(약 6000만원)에 구입한 캐딜락 XTS를 10년째 타고 있다. 그것도 중고차다. 자신은 1년에 겨우 5000㎞밖에 타지 않기 때문에 비싼 차를 살 필요가 없다는 지론이다.

즐겨 먹는 식사는 맥도날드의 3~4달러짜리 햄버거다. 2017년 HBO 다큐멘터리 ‘워런 버핏 되기(Becoming Warren Buffett)’에 따르면 그는 매일 아침 맥도날드에 들러 소시지 패티 2개나 계란, 치즈, 베이컨 중 일부 조합으로 구성된 3.17달러짜리 메뉴를 콜라 한 잔과 함께 먹곤 한다. 점심에는 종종 패스트푸드점 데어리퀸에 들러 칠리치즈도그와 함께 체리 시럽과 다진 견과류를 곁들인 선데 아이스크림을 먹고, 간식으로는 씨즈캔디의 사탕이나 초콜릿을 자주 먹는다. 미 경제지 포천은 최근 “버핏의 장수 비결은? 코카콜라와 캔디, 그리고 삶의 기쁨”이라고 꼽기도 했다.

2015년 6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포브스 자선 서밋 시상식’만찬장에서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워런 버핏(왼쪽) 버크셔해서웨이 회장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게티이미지]

1991년 버핏을 처음 만난 이후 30년 넘게 우정을 나누고 있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는 과거 버핏과 함께 간 홍콩 여행기를 소개한 바 있다. 게이츠는 “우리는 점심으로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기로 했다”며 “당신(버핏)은 점심을 사겠다고 하더니 주머니를 뒤져 쿠폰을 꺼냈다”고 회상했다.

딸이 어렸을 때 침대 사는 돈이 아까워 서랍장을 빼서 침대 대용으로 사용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에도 버핏은 이미 백만장자였지만 너무 검소한 생활 탓에 자녀들은 아버지가 부자라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라고 한다.

옷차림도 유행을 신경 쓰지 않고 정해진 스타일만 입는다. 버크셔를 인수한 후 대규모 자산을 굴리는 CEO가 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누더기 옷을 입은 남자’로 보였다.

자신이 하는 일에만 온전히 집중하고 주변 환경이나 관심이 없는 분야는 아예 인식을 못 하는 편으로, 요즘으로 치면 ‘너드남(nerd+男 합성어: 한 가지에 몰두하는 남자)’의 삶을 살아 왔다.

1952년 워런 버핏(오른쪽)과 수잔 버핏의 결혼 사진 [비즈니스인사이더]

하지만 가족과 가까운 사람에게는 친절한 ‘사랑꾼’이기도 하다. 아내 수잔 톰슨 버핏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해 22세에 결혼했고, 사별할 때까지 52년간 해로했다. 수잔이 암에 걸리자 직접 간호했으며 먼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한동안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아내가 암 선고를 받은 2003년 조지아 공대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버핏은 “여러분이 내 나이가 되면 ‘나를 사랑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몇 명이나 실제로 나를 사랑하는지’를 가지고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산 99% 내놓겠다”…변화 이끈 기부왕

버핏이 다른 부자에 비해 유독 폭넓은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것은 막대한 부를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고 사회와 인류를 위해 나눌 줄 알기 때문이다.

‘재산은 모름지기 사회로 환원돼야 하는 보관증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생전 또는 사망 후 전 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고 2006년 서약한 뒤 이를 꾸준히 실천해 왔다.

2010년에는 게이츠와 함께 부자들의 기부 운동 ‘더기빙플레지(The Giving Pledge)’를 시작해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등 수백 명이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도록 이끌었다. 한국에서도 김봉진 배달의민족 창업자와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동참한 바 있다.

버핏은 자신이 미국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고, 어떤 사람이 운명은 그 사람이 사는 사회와 관계가 있다는 ‘난소 로또’의 개념을 바탕으로 빈곤과 불평등에 관심을 기울였다. 여성의 생식 권리를 제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낙태의 합법화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더 많은 사람을 돕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재산을 내놨고, 부자이면서도 부자 증세를 주장했다.

자신의 세 자녀에게는 300만달러(약 40억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기부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특히 게이츠가 운영하는 세계 최대 규모 자선 재단인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버크셔 주식의 대부분을 기부했다.

그러나 게이츠 부부가 이혼한 후 재단이 분할되자 사후에는 자녀들이 공동 관리하는 공익 신탁에 재산을 넘기겠다고 유언장 일부를 수정했다. 그러면서 “세계에는 80억명이 있고, 나와 내 자식은 1% 중 가장 운이 좋은 100번째 안에 든다”며 “우리만큼 운이 좋지 못한 사람을 돕는 데 쓰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거액의 기부를 두고 일각에서는 증여세, 상속세 등 세금을 회피하는 수단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버핏을 “합법적 탈세의 달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부자가 더 적은 금액도 기부하지 않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데 급급한 현실 속에서 버핏 같은 거부가 거의 전 재산을 쾌척하겠다고 선언하고, 실제로 많은 돈을 기부하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버핏이 현재까지 기부한 금액만 600억달러(약 80조원)에 달한다. 1993년 포브스 선정 세계 최고 부호였던 그의 순위가 점점 내려간 것도 기부의 영향이 컸다.

“버핏은 자기 나름의 어떤 삶을 살고자 했고, 그 삶이 버핏에게 사회적인 공적과 기반을 마련해 줬다. 분명히 말할 수 있지만 버핏이 살아온 삶은 다르게 살았을 수도 있는 삶보다 훨씬 더 멋지다”는 멍거의 말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버크셔 시총 1조달러 돌파…빅테크 제외 美 기업 중 처음

버핏의 혜안은 버크셔해서웨이의 주가로도 인정을 받고 있다. 버크셔해서웨이의 시총은 지난달 28일 장중 1조달러(약 1330조원)를 넘어섰다. 빅테크를 제외한 미국 회사가 시총 ‘1조달러 클럽’에 이름을 올린 것은 버크셔해서웨이가 처음이다.

버크셔해서웨이 주가는 올해만 31% 오르며 뉴욕증시 대표 지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의 상승률(18%)을 크게 웃돌았다.

오마하에 본사를 둔 버크셔해서웨이는 보험업을 중심으로 에너지, 철도, 제조업, 금융업, 소비재 브랜드 등의 자회사를 거느린 복합기업이다.

투자 및 사업 영역 대부분이 ‘구(舊)경제’를 대변하는데, 이는 사업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기업을 내재가치보다 싼 가격에 사들여 장기간 보유하는 버핏의 ‘가치투자’ 철학과 맞물린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

김현경 기자

pin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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